[시론]100여년 전의 경험과 ‘균형외교’
본문 바로가기
경향 국제칼럼

[시론]100여년 전의 경험과 ‘균형외교’

by 경향글로벌칼럼 2015. 6. 21.

오늘은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된 지 50주년이 되는 날이다. 1910년 일본의 침략으로 파탄 났던 국가 대 국가의 관계가 복원된 날인 것이다. 그런데 일본의 사실상 독점은 110년 전인 1905년 을사늑약 때부터였다. 그 시점에서 어떤 열강도 한반도에서 일본의 독점을 반대하지 않았다. 110년 전 일본이 만든 단독 찬스는 우연한 결과물이 아니었다. 일본은 러일전쟁에서의 연이은 승전을 외교로 굳히고, 국제사회로부터 한반도에 대한 독점권을 인정받았다. 2개월도 안된 사이에 미국, 영국, 러시아와 카쓰라 태프트밀약, 제2차 영일동맹, 포츠머스조약을 체결한 것이다.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은 고종의 중립화 정책이 파탄 났음을 의미한다. 고종은 1900년 특명전권공사를 일본에 파견해 한반도 중립화를 제안했다. 일본은 공방(攻防)동맹을 요구하며 이를 거부했다. 이후에도 고종은 유럽 열강의 지지를 얻고자 특명전권공사들을 파견했지만 소득이 없었다. 그 사이 일본은 러시아가 만주에서 군대를 철수시키지 않자 만주와 한국이 일체라는 외교논리를 내세우며 자신의 욕심을 숨기지 않았다. 러시아는 만주의 조차지와 군대를 기반으로 한반도의 중립화를 내세우기도 했다. 결국 그들은 타협하지 않고 남의 나라 땅에서 전쟁을 일으켰다. 그들만큼 만주와 한반도에 적극 관심을 표한 나라는 없었다. 다른 열강은 동북아의 특정 지역을 직접 지배하기보다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하고 경제적 이윤을 극대화하는 데 더 관심을 두었다. 1901년 의화단운동을 진압한 열강들이 청 정부를 상대로 체결한 베이징의정서는 이를 보장한 조약이었다. 베이징의정서는 만리장성 이남의 중국 땅에 대해 열강 사이의 협조관계가 형성되었음을 의미한다. 다자적 질서라고도 말할 수 있는 제국지배공조체제가 형성된 것이다. 같은 시기에 아프리카에서 식민지 획득 경쟁을 벌이고, 발칸에서 긴장관계를 유지하던 열강의 움직임과 전혀 다른 양상이다.

더구나 열강의 정부가 나서서 적극적인 외교정책을 벌여야 할 만큼 대한제국에 경제적 이권이 풍부하지도 않았다. 실리외교로 중립화를 보장할 정도가 아니었던 것이다. 또한 열강의 동아시아 정책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을 만큼 대한제국의 정치적 풍향이 중요하지도 않았다. 열강의 동아시아 정책은 중국이 중심이었다. 열강은 대한제국에서 자국민의 이권만 보호받으면 되었다.

중립화 정책이 실패한 데는 지배층의 문제도 있었다. 고종은 미래의 비전과 통합의 지도력을 발휘해 관료와 지식인 집단을 하나로 묶기보다 측근 중심의 궁중정치를 폈다. 황제권의 독주에 실망한 관료와 지식인 가운데 중립화보다 한·일 동맹을 지지하는 사람이 유독 많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그들은 명확한 시국관을 갖고 한·일 동맹을 주장하기보다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는 쪽에 더 관심을 두었다. 100년 전의 중립화란 용어를 세력균형이란 측면의 현재적 버전으로 말하면 ‘균형외교’일 것이다. 이 말은 최근 들어 유독 많이 회자됐다. 작년에는 중국의 적극적인 역사공조 움직임에 한국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를 놓고 설왕설래가 있었다. 올해 들어서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의 가입,미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배치문제와 맞물려 큰 논란이 있었다.

AIIB 일러스트 (출처 : 경향DB)


한국은 비슷한 고민을 앞으로도 계속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100여년 전처럼 그냥 계속 중립을 취해야 할까. 아니면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할까. 이것도 아니면 새로운 무엇인가를 제시하며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야 할까. 분명한 현실은 미국과 중국 어느 쪽도 한반도 분단을 최상의 시나리오로 간주하고 있으며, 한국과의 원만한 관계도 차선의 동아시아 정책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분단을 극복하는 1차적 힘은 지역주의, 이념갈등, 경제 격차를 넘어서며 사회적 합의를 달성하는 우리 내부에서 끌어내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주변 강국들의 경쟁적 협력관계를 넘어설 수 있는 미래가치를 함께 공유해야 한다.


신주백 | 연세대 HK 교수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