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사변과 한 앵커의 사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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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

만주사변과 한 앵커의 사퇴

by 경향글로벌칼럼 2015. 12. 27.
 “만주 출동 준비 중.”

1931년 9월19일 일본 도쿄의 육군 참모본부에 한 통의 급전이 날아왔다. 전날 중국 만주 펑톈(奉天) 부근에서 철도 폭파 사건이 일어나자 한반도에 주둔하던 일본군이 보낸 것이었다. “철도 폭파 사건은 중국군의 소행”이라며 군사행동에 돌입한 일본군은 ‘자위권 발동’을 이유로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파병 제1진은 곧바로 서울을 출발했다. 일본의 참모본부는 당황했다. 일왕 명령 없이 만주에 출병하는 것은 ‘군주의 군 통수권’을 완전히 무시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참모본부가 조선 주둔군에 ‘압록강을 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이들이 독단적으로 만주로 출병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군국 일본이 ‘전쟁의 길’에 첫발을 내디딘 만주사변의 시작이다.

사변 전까지만 해도 일본 언론들은 군부에 비판적이었다. 아사히신문은 사설을 통해 “군부가 정치나 외교에 관여해 이를 행동으로 옮기면…이보다 더 심각한 위험은 없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사변 발발 후 언론의 태도는 급변했다. 호외를 발행해 철도 폭파가 중국의 계획적 행동이었으며, 일본은 자위권을 발동했다는 일본군의 발표를 가감없이 전달했다. 군사행동이 확대되면서 ‘침략’의 양상이 뚜렷해졌는데도 “어쩔 수 없는 조치”라고 옹호했다. 나아가 일본의 괴뢰 정권인 ‘만주국’이 설립되자 이를 환영하기까지 했다. 당시 일본 언론의 이런 모습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당시 일본 육군성 출입기자단에는 ‘신문반’이라는 게 있었다. 일종의 검열 당국과 같은 기능을 하는 것으로 언론 통제를 담당했다. 실제 신문반의 한 장교가 기자에게 “철도 폭파는 우리가 일으킨 것”이라고 귀띔했지만 지면에 반영되지 않았다. 언론이 스스로를 규제하고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에 편승해 부수를 늘리려는 계산도 작용했을 법하다. ‘군국주의’가 판치던 일본에서 언론 길들이기는 당연한 일로 자리 잡았다. 1938년 군이 기자들을 데리고 아타미(熱海) 온천 여행을 시켜줬고, 당시 육군차관 도조 히데키는 자기 월급에 해당하는 300엔을 쾌척했다.

지난 1년여간 일본 언론을 돌아보면 80여년 전 만주사변을 전후해 일어났던 장면을 연상케 하는 일들이 나타나고 있다. 지난 6월 열린 문화예술간담회에서는 “(마음에 안 드는) 언론에 따끔한 맛을 보여주려면 광고 수입을 없애면 된다”는 한 참석자의 발언이 나와 물의를 빚었다. NHK 경영위원을 지낸 작가 햐쿠타 나오키(百田尙樹)는 오키나와 기지 정책 등을 비판해온 현지 언론을 거론하며 “뭉개버려야 한다”고까지 했다. 지난해 총선을 앞두고는 자민당이 방송사에 ‘공정하고 중립적으로 보도하라’ ‘아베노믹스에 관해 균형있게 보도하라’는 등의 문서를 보냈다. 민영 방송인 TV아사히 간부를 자민당 회의에 불러 논란이 일었던 프로그램의 제작 및 방송 경위를 설명하도록 하기까지 했다.

일본의 우익성향 작가 햐쿠타 나오키_연합뉴스


며칠 전 TV아사히의 간판 앵커 후루타치 이치로(古館伊知郞)가 12년간 진행해온 메인 뉴스 프로그램 <보도 스테이션>을 떠난다는 발표가 있었다. <보도 스테이션>은 그간 정권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해온 프로그램이다. 지난 3월에는 원전 재가동 정책을 비판해온 전 경제산업성 관료가 생방송 도중 본인이 정권의 압력으로 물러나게 됐다고 주장하며 “나는 아베가 아니다(I am not Abe)”라는 영문을 적은 종이를 펼쳐 파문이 일기도 했다. 후루타치는 이 사건과 앵커직 사퇴가 “전혀 관계없다”며 일축했지만 그의 퇴임 배경을 놓고 갖가지 억측이 나오고 있다.

아베 정권의 교묘한 미디어 다루기 전략은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아사히나 마이니치, 도쿄신문 등 정부에 비판적인 진보 언론과 산케이나 요미우리 등 보수지를 나눠 보이지 않는 ‘차별 대우’를 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런 전략이 먹혀든 사례도 종종 나타난다. 주변에서 ‘폭주’로 규정하는 아베의 정책에 우호적인 기사가 ‘국익’을 포장해 등장한다. 일부 매체는 비판적 언론인 몇몇을 징계하는 등 정권의 압력에 굴복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21세기 일본에서 일어나기엔 너무 후진적인 장면이 아닌가. 하나 덧붙이자면 지난 4월 국제인권단체 프리덤하우스가 발표한 ‘2015 언론자유 보고서’에서 일본의 언론자유지수는 전체 199개국 중 41위였다.

시곗바늘을 다시 80여년 전으로 되돌려보자. ‘군국 일본’에서 언론과 군의 밀월관계가 계속됐다. 언론은 만주사변에 이어 중일전쟁, 나아가 2차 세계대전까지 군사 행동을 정당화했다. 그 같은 행태는 한동안 침묵 속에 묻혀왔다. 언론 책임론에 대한 검증과 자기반성은 2차대전이 끝나고 40여년이 지난 뒤에야 이뤄졌다.


조홍민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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