벅찬 한반도 평화협정, 지금 감당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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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유신모의 외교 포커스

벅찬 한반도 평화협정, 지금 감당할 수 있을까

by 경향글로벌칼럼 2016. 3. 16.

북한의 4차 핵실험·장거리 로켓 발사로 가장 곤란한 상황에 빠진 나라는 중국이었다. 중국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강력한 대북 제재 결의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던 배경이기도 하다. 하지만 중국은 안보리 결의 채택 이후 국면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다. 사실 중국은 잃은 것이 없다. 대북 제재의 실효성 여부는 중국이 하기에 달려있다. 역대 최강의 제재라는 커다란 채찍을 중국의 손에 쥐여줌으로써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키워준 셈이다. 중국은 안보리 결의 이행을 명분으로 북·중관계 훼손을 최소화하면서 북한을 제재할 수 있다. 또 제재의 ‘완급 조절’을 통해 북한을 통제하고 미국도 움직일 수 있다.

정권 교체기를 맞고 있는 미국은 앞으로 최소 1년 동안은 정책적 변화를 주거나 북한 문제에 매달릴 수 없다. 미국이 중국에 운전석을 내준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이 대책없이 중국에 주도권을 넘긴 것은 아니다. 미국은 중국의 일방적 독주를 막기 위한 카드를 갖고 있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의 한반도 배치, 중국이 직접 대상이 될 수 있는 ‘세컨더리보이콧’ 실행 등이 그것이다. 북한 문제는 이처럼 미·중의 전략적 이해관계의 틀 속에서 다뤄지고 있다. 미국이 적어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중국이 요구하는 ‘신형대국관계’를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은 지난 8일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중국은 안보리 결의를 전면적이고 완전하게 이행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중국은 안보리 결의에 제재 방안뿐 아니라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내용이 명시돼 있음을 강조한다. 따라서 중국의 ‘전면적이고 완전한 결의 이행’은 제재 강화와 함께 대화 재개를 위한 노력에도 적극 나서겠다는 의미다. 왕 부장이 북·중관계를 ‘정상적 국가 관계’라고 언급한 것도 한·미를 겨냥한 발언이다. 중국은 북한과 더 이상 ‘혈맹의 특수관계’를 유지하지 않고 있는데 한·미는 여전히 군사동맹 강화에 매달리는 냉전시대적 태도를 고집하면서 한반도 평화·안정·비핵화를 위한 노력에 역행하고 있다는 중국의 관점을 드러낸 것이다.

왕이 중국 외교부장이 8일 베이징 미디어센터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한반도 정세와 대북 제재안에 관한 입장을 말하고 있다._AP연합뉴스

아무리 혹독한 제재를 가한다고 해도 결국 최종적으로 문제를 푸는 것은 외교적 협상이다. 중국은 이제 자신들의 방식으로 한반도 문제를 풀기 위해 강력히 움직일 것이다. 중국은 이미 ‘비핵화와 평화협정 논의의 병행추진’이라는 실행 방안까지 마련해두고 있다. 한·미는 비핵화가 평화협정보다 우선이라는 공식적인 입장을 유지하고 있지만 앞으로 어떤 식으로 논의가 진행되더라도 평화협정 문제를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다. 그동안 한국을 포함한 당사국들이 북핵 문제에 몰두하지 않은 탓에 이제는 북핵만을 떼어서 따로 논의할 수 있는 단계는 지나버렸다. 앞으로 비핵화는 동북아와 한반도의 안보구조를 바꾸는 과정에서 하나의 구성요소로 다뤄지게 될 것이다. 그만큼 비핵화의 길은 험난해졌다.

평화협정은 60년 이상 지속돼온 한반도의 냉전구도를 해체하는 작업이다. 시작과 과정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마지막 단계는 비핵화, 북·미관계 정상화, 평화협정 체결이 동시에 이뤄지는 형태가 될 수밖에 없다. 전인미답의 길이며 정치·군사·경제·민족 등 중층적 요소를 동시에 다뤄나가야 하는 외교의 ‘종합예술’이다. 수순이 틀리거나 한 발만 잘못 내디뎌도 민족의 운명이 뒤바뀔 수 있는 위험천만한 길이기도 하다. 평화협정이 체결된다고 해도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평화체제가 구축되는 것은 아니다. 평화체제는 남북관계와 주변 강대국의 정치·군사적 이해관계가 상호작용을 하면서 국제적·제도적으로 평화 상태를 보장받을 수 있어야 가능해진다. 특히 한국은 ‘분단을 영구화하는 평화체제’가 아니라 ‘통일을 지향하는 평화체제’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주변 강대국과도 입장이 다르다.

정부가 과연 이 같은 고도의 외교적 과제를 감당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드러난 박근혜 정부의 외교적 역량으로는 가능하지 않아 보인다. 이 정부는 지난 3년간 남북관계를 더 이상 손댈 수 없을 정도로 악화시켰고 미·중 균형외교에도 실패했다. 북한 핵실험 대응 과정에서 중국·러시아에 대한 외교적 자산을 모두 탕진했고 대일 외교에도 철저히 실패했으며 굴욕적 한·일 위안부 문제 합의로 국격을 땅에 떨어뜨렸다. 손대는 외교 사안마다 ‘불가역적으로’ 망가뜨린 탓에 다음 정부는 이를 수습하는 데만도 벅찰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유지의 유일한 수단으로 남은 평화협정 문제까지 다루게 되는 것은 위험하다. 제발 이 문제만은 손대지 말고 다음 정부에 넘겼으면 한다. 천하의 이순신 장군이 다시 나타난다고 해도 배 12척은 남겨줘야 나라를 구할 수 있다.


유신모 | 외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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