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시, 논란의 끝으로 가버린 셀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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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목수정의 파리 통신

또 다시, 논란의 끝으로 가버린 셀린

by 경향글로벌칼럼 2011. 2. 16.

루이 페르디낭 셀린(Louis Ferdinand Celine). 그는 20세기 프랑스 작가 중 푸르스트(Proust)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이 번역되고 알려진, 프랑스 문단에 전기와도 같은 충격적인 흔적을 남긴 작가다.
 
그러나 셀린을 무엇보다 오래 회자되게 하는 것은 반유태작가로서의 오명이다. 그가 2차 대전을 즈음하여 드러낸 반유태주의 입장에는 반박의 여지가 없다. 특유의 가차없이 통렬한 언어로 그는 반유태주의 시각을 담은 팸플릿을 작성했고, 반유태주의 모임에 참석하여 연설하기도 했다. 이 같은 행적은 그로 하여금 6년간의 옥고를 치르게 하며, 전후 프랑스 법정에서 국적과 재산을 박탈당하게 하고, 사면된 이후에도 외부와의 접촉이 차단당한 삶 속에 그를 가둔다.

그의 과오가 사법적 판단에 의해 이토록 철저하게 규명되고 혹독한 죄값을 치르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작가로서의 셀린은 많은 이들이 알베르 카뮈와 더불어 그를 프랑스 대표 작가로 꼽을 만큼 확고한 자리를 지켜왔다.

그가 죽은 지 50년이 되는 올해, 프랑스 문화부는 2011년에 국가적으로 기념해야 할 인물의 한 사람으로 셀린을 리스트에 올렸다가 뒤늦게 유태인 단체의 비난에 밀려 삭제하는 소동을 빚었고, 이로 인해 다시 한 번 셀린은 논란의 주인공으로 떠올랐다.

셀린은 누구보다도 자유롭게 자신이 목도한 현실을 신랄하고 살아있는 언어, 특유의 쓰고도 감미로운 해학으로 표현해내던 작가였다. 출세작 <밤의 끝으로의 여행>에서, 그는 호전적인 민족주의와 식민주의를 맹렬히 비판했고, 그를 확고한 기반 위에 올려놓은 또 다른 작품 <외상 죽음>에서는 자본주의를 공격한다. 36년 러시아 여행에서 돌아온 뒤엔 당시 러시아에서 진행되는 공산주의의 허구를 소설 <죄의 고백>을 통해 맹렬하게 폭로했다.


                                                루이 페르디낭 셀린. 출처: pasunautre.com

의사이기도 했던 그는 전쟁 중에는 연합군들은 물론 가난한 자들을 위한 무료진료를 했다. 유태인들에 적대적 감정을 품었을지언정 나치에 협력했던 페탕 정부 하의 프랑스를 매서운 아이러니로 고발하기도 했다. 이처럼 자신이 마주하던 모든 전체주의에 대해 날카로운 펜을 휘둘렀던 그가 반유태주의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입장에 실족한 바 있다 하더라도, 이미 그 대가를 치렀고, 그의 대부분의 작품세계가 반유태주의와 무관한 것임을 들어 문화부의 줏대 없는 태도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프랑스 사회에 드세다.

이 비난의 한 가운데에는 <반유태주의>라고 하는 프랑스 사회에서 가장 치명적이고 민감한 금기에 대한 “저항”이 작동한다. 이스라엘의 가자지구에서의 만행을 비난했다는 이유로, <분노하라>의 작가 스테판 에셀의 강연이 유태인 사회의 압력에 의해 취소된 사건이 사람들을 경악시킨 직후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유태인들이 나치로부터 겪은 고통은, 반유태주의를 이 사회 최고의 금기로 만듦과 동시에, 점점 나치정권을 닮아가는 이스라엘 정부의 태도에 이성적인 비판을 거부하는, 스스로를 향한 칼날로 변모하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느끼고 있는 것이다.

예술가의 압도적 명성이 그의 정치적인 과오를 덮어서도, 예술가의 정치적인 과오가 예술적인 성취 자체를 지워서도 안된다. 과오가 있었다면 그 부분에 대해 명백하게 규명하고 기록하여 알리되, 그가 남긴 작품들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평가할 일이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친일작가들을 가진 우리. 그들을 모두 구덩이에 파묻을 수도, 여과없이 찬양할 수도 없는 난감한 시절을 오래 보내왔다. 규명되지 않은 역사는 언제고 우리의 발목을 잡고, 넘어뜨리며, 논란 속에 빠뜨리는데… 서정주의 아름다운 시를 후손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그의 친일행적을 감춰야할 필요는 결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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