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갓길 헤매는 ‘후라리맨’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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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김진우의 도쿄 리포트

귀갓길 헤매는 ‘후라리맨’ 논란

by 경향글로벌칼럼 2017. 12. 13.

‘가정을 가진 남성이 퇴근 후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최근 일본에서 일명 ‘후라리맨’을 두고 반응이 엇갈리고 있다.

 

‘후라리맨’은 ‘흔들흔들’을 뜻하는 일본어 ‘후라리’에 남성을 뜻하는 영어 ‘맨(man)’을 합친 말이다. 원래 가정을 돌보지 않고 일만 했던 남성들이 정년 퇴직 후 가정에서 있을 곳이 없어 거리를 헤매는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한 일본 사회학자가 만들어낸 용어다. 그런데 최근엔 ‘후라리맨’이 한창 일할 나이인 남성들에게도 쓰이고 있다. 회사 업무가 끝난 뒤에도 귀가하지 않고 거리를 헤매는 남성들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논란의 발단은 공영방송 NHK의 한 정보프로그램이 이 ‘후라리맨’을 특집으로 잇따라 다루면서다. 방송에선 퇴근 후 집에 바로 가지 않고 근처 공원 벤치에서 책을 읽거나 카페에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남성 회사원들이 등장했다. 저녁 시간대 도쿄 시내의 가전양판점에 양복 차림의 남성들이 가득한 모습도 보여줬다. 일본 정부가 최근 추진하고 있는 ‘일하는 방식 개혁’으로 퇴근이 빨라졌지만 정작 여유시간을 어떻게 활용할지 모르는 남자들이 ‘후라리맨’이 된다는 설명도 뒤따랐다.

 

방송이 나간 뒤 인터넷에는 비판 댓글이 쇄도했다. 프로그램에 등장한 남성들이 “혼자만의 시간의 필요하다” “일찍 귀가해도 아내의 집안일에 방해가 된다” 등의 이유를 댔는데, 이게 ‘기름에 불을 붙인 격’이 됐다. “아내에게 가사와 육아를 강요하고 무슨 말을 하는 거냐” “혼자만의 시간은 여성도 필요하다” 등의 비난이 잇따른 것이다. 그중에는 “워킹맘이 식사를 만들지 않으면 ‘엄마 실격’이라면서, 남성은 ‘후라리맨’이라고 해서 ‘여러 부담을 지고 있으니까 어쩔 수 없다’라니 도대체 뭐냐”라는 신랄한 비판도 있었다.

 

그러자 NHK는 후속 보도로 이 같은 반론들과 실태들을 더 다뤘다. 다른 방송이나 신문, 잡지도 관련 기사를 앞다퉈 보도했다. 그런데 후속 보도들에서도 여전히 찝찝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남자도 괴로워’류의 흥미 위주식 보도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NHK는 비판의 목소리를 소개하면서도 “바로 집에 가고 싶지 않은 기분을 이해한다” “전업주부라도 바로 집에 가고 싶지 않다” 등 ‘공감의 목소리’를 전했다. 마치 여론이 찬반으로 양분된 인상을 준다. “아이 중심의 집은 거북하다” “육아 스트레스를 안고 있는 아내와 마주하고 싶지 않다”는 남성들의 심리를 전했다. 한 언론에선 “집 안 내 서열이 반려동물보다 아래”라는 ‘핍박받는 남성’ 사례를 다루기도 했다. NHK는 또 앞서 소개된 남성이 아내와 일주일에 한 번 피아노를 배우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취미를 함께하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이 부부는 자녀가 없었다.

 

물론 남자도 괴롭다. 사회는 무뚝뚝하게 일에만 몰두하는 것이 미덕이던 과거와는 다른 남성상을 요구하고 있다. 최근 일본에선 ‘이쿠맨(육아하는 남자)’이라는 말이 쓰이고 있다. 하지만 ‘이쿠맨’이 마치 능력 있는 남성의 ‘브랜드’처럼 쓰이는 면도 없지 않다. 가사와 육아라는 끝나지 않은 작업에 짓눌려 사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일련의 후라리맨 보도에선 사회의 요구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진지하게 짚는 대목을 좀체 보기 힘들다. 일본에는 여성 60%가 첫째 아이를 낳은 뒤 퇴직하는 등 성별 역할 분담이 강고하게 남아 있다. 반면 일손 부족으로 여성의 사회 진출을 적극 권장하고 있다. 일본 정부의 의도는 차치하고 ‘일하는 방식 개혁’의 지향점은 남성이든 여성이든 짧은 시간에 효율적으로 일하고, 부부가 적정하게 가사·육아를 분담하는 것이다. 종국엔 가정과 일을 병립하고, 아이를 키우기 쉬운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후라리맨’ 논란은 그러한 의식과 제반 여건이 일본 사회에서 여전히 미흡하다는 점을 거꾸로 보여줬다.

 

<도쿄 | 김진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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