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메모] ‘한국 기억상실증’ 럼즈펠드의 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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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유신모의 외교 포커스

[기자메모] ‘한국 기억상실증’ 럼즈펠드의 오진

by 경향글로벌칼럼 2011. 2. 11.
조지 W 부시 1기 행정부 국방장관으로 이라크전쟁을 주도했던 도널드 럼즈펠드의 회고록이 지난 8일 출간됐다. 그는 회고록에서 2003년 방한 당시 한국의 이라크 파병 반대 여론에 대해 언급하면서 한국이 ‘역사적 기억상실증’을 갖고 있다고 썼다. 50여년 전 미국의 젊은이들이 한국에서 죽어간 은혜를 망각하고 한국이 미국이 주도하는 이라크전쟁에 동참하기 꺼렸다는 것이 이유다. 
 
한국전쟁과 이라크전쟁을 동일한 성격의 사건으로 믿고 있는 그의 역사 인식이 놀랍다. 유엔 결의를 통해 세계 각국이 자발적으로 참전한 한국전쟁과 ‘명분없는 전쟁’으로 불리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같을 수는 없다.

한국이 ‘역사적 기억상실증 환자’라면 2차대전 때 미국의 도움으로 나라를 되찾았으면서도 이라크전에 동참하지 않은 프랑스에도 같은 진단이 내려져야 한다. 또 미국을 따라 전쟁에 동참한 영국의 토니 블레어 총리가 ‘부시의 푸들’이라는 조롱을 받을 이유도 없다.

한국은 과거에 빚진 것이 있으니 많은 국가들이 거부한 명분없는 전쟁에도 당연히 동참하라고 당당히 요구하는 그의 태도에서는 동맹국 국방장관이 아니라 빚을 못 갚으면 살을 잘라가겠다는 셰익스피어의 희극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하는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의 모습이 연상된다. 

지난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증세가 심각한 쪽은 따로 있다. 사담 후세인이 세계 안보를 위해 제거돼야 마땅한 위험한 독재자가 된 것은 불과 수년 전까지 미국이 이란을 견제하기 위해 후세인에게 군사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사실을 ‘편리하게’ 망각했기에 가능했다. 또 아부 그라이브 수용소의 야만적 고문을 승인했던 럼즈펠드가 회고록에서 이에 대한 반성을 보이지 않은 것은 불편한 지난 일은 기억하지 못하는 독특한 증상의 기억상실증 때문일 것이다. 

부시 행정부 초기 한·미관계가 삐걱거렸던 이유는 한국이 배은망덕한 탓이 아니라, 미 행정부에 럼즈펠드 같은 인식을 가진 ‘네오콘’들이 많았기 때문이라는 사실만은 기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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