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열은 존재를 잠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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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목수정의 파리 통신

검열은 존재를 잠식한다

by 경향글로벌칼럼 2010. 10. 8.

목수정 작가·프랑스 거주

목요일자 리베라시옹의 1면은 소년과 소녀가 벗은 몸으로 사랑을 나누는 사진으로 덮여있다. 파리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미국의 사진작가 래리 클라크의 사진전에 파리시가 18세 미만 입장금지 조치를 취한 데 대한 리베라시옹의 격앙된 고발이었다. 3면에 걸쳐, “다시 중세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은” 이 당찮은 검열에 대해 리베라시옹의 분노는 차고 넘쳤다. 68혁명으로, 프랑스사회는 ‘금지를 금지하는’ 데 일찍이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데 성적 터부에 대한 격렬한 저항의 상징같던 동성애자 시장 들라노에가 청소년들의 성애를 담은 사진에 대한 검열의 빗장을 내걸었다는 사실은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래리 클라크의 사진들이 담고 있는 것은 바로 그들이 금지시키는 대상, 10대들이다. 그의 유명한 영화 <키즈(Kids)>에서처럼 뉴욕 뒷골목에 몸을 비비며 살아가는 10대들의, 대도시 뒷골목에 내던져진 삶을 담았다. 그들은 거기서 섹스에 탐닉하고, 마약을 복용하며, 도둑질, 주먹질을 일삼아 세월을 보낸다. 우리가 부정할지라도, 그것은 세상의 모든, 사회를 향해 거칠게 분노를 뿜어내는 10대들의 모습인 것이다.

이미 현대의 고전이 되어버린 래리 클라크의 사진은 이미 많은 도시에서, 그 어떤 검열도 없이 전시되어 왔다. 거리에 무방비로 노출된 포르노잡지, 순식간에 수십명을 쏴 죽이는 수많은 영화들, 전쟁을 미화하고 선동하는 방송들, 전쟁과 최신 무기들로 넘쳐나는 게임들은 방관한 채, 10대들의 리얼한 삶의 단면인 성애야말로 감추어야 할 위험한 장면이다? 감히 이렇게 주장하는 이들은 극우 가톨릭 집단이었다. 파리시는 바로 이런 극우집단들이 다른 도시에서 벌여온 소동과의 긴 소송을 피하기 위해 이런 선택을 했음을 변명으로 늘어놓는다. 들라노에 시장은 “20년 전에는 쉬웠던 일이, 오늘에 와선 문제를 야기한다”고 털어놓는다. 어지러운 속도로 후퇴해버린 프랑스 사회에 필요 이상으로 잘 적응한 그의 모습이 허탈할 뿐이다.

티아라의 지연. 필시 암담하고 혹독한 연습생 시절을 거쳐, 이제 막 가수로 활동하기 시작한 17세 소녀가 한국포털 사이트들에서 일제히 검색어 1위에 이름을 올렸던 것도 같은 시점이다. 많은 이들이 그녀라고 추정한 10대 소녀의 소위 음란채팅 동영상이 인터넷에 출몰했던 것. 지옥에서 들려오는 외침인 것 같았던 타블로 학적공방이 간신히 검찰의 개입을 통해 끝을 보는가 싶더니, 영웅 아니면 마녀가 네티즌들에겐 언제나 필요한 것인지 의미없는 진실공방이 또 다시 번진다. 그 소녀가 바로 이 소녀이든 아니든, 연예인 삶의 사소한 진실이 자신의 삶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건지. 아니면 초라한 자신의 삶에 연예인들을 동원시켜, 그들에게 열광 또는 비난을 해야만 살아질 만큼, 삶이 연예인들에게 종속된 것인지.



돌려보고, 킬킬대고, 그리곤 단죄하는 이 조악한 네티즌들의 생존 방식은 자고나면 몸집을 불려가는 바오밥나무처럼 우리가 사는 터전 자체를 좀먹는다. 뉴욕 빈민가의 10대들이 그런 것처럼, 무한경쟁을 유년기부터 체득하는 우리의 10대들에게도, 세상에 대한 분노와 충족되지 않은 욕구는 충돌하고 파열하게 마련이다. 그것이 지연이든 또 다른 소녀이든, 그것이 그녀가 즐겼던 유희의 방식이든 아니면 일시적 반항이든, 누구도 그 누구를 단죄할 수도, 할 필요도 없다.

세상은 여기 저기서 반동으로 흘러가지만, 시퍼런 언론이 지금 우리가 수치스러운 시대를 통과하고 있음을 날카로운 목소리로 환기시킬 때 적어도 퇴보의 속도를 늦출 순 있다. 그러나 방송도 언론도 익명의 네티즌들이 무서워 눈치를 보는 사회에서, 가상의 공간에서 피어난 바오밥은 급속도로 우리가 사는 별을 뒤덮고 우리를 삶에서 내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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