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의 북핵·한반도 정책에 의구심을 갖게 된 것은 정부가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 증가에 군사적 조치로 맞서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문재인 정부가 지향했던 가치나 대선후보 시절 공약과는 다른 방향으로, 그것도 매우 빠른 속도로 일이 진행됐기 때문이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6차 핵실험 이후 정부는 대통령이 공언했던 법적 절차를 무시하고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배치를 결정했고 탄두중량을 무제한으로 늘렸다. 또 한국의 방위 수요를 훨씬 뛰어넘는 핵잠수함 도입을 공개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정부 일각에서 제기되는 전술핵 재배치 주장을 적극적으로 차단하려는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문재인 대통령은 미국·일본 지도자보다 훨씬 강력한 표현으로 대북 제재 강화를 말한다.

 

[김용민의 그림마당] 2017년9월4일 (출처: 경향신문DB)

 

이에 대한 청와대의 설명은 북한의 탄도미사일 발사와 6차 핵실험 등 ‘안보상황의 변화’ 때문이라는 것이다. 안보상황이 엄중해져서 군사적 조치를 강화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은 일리가 있지만 위험하다. 그 말대로라면 북한이 지속적으로 미사일을 발사할 경우 전술핵 재배치는 물론 핵무장까지 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북한이 이끄는 대로 깊은 군비경쟁의 늪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한국은 이 악순환에서 빨리 빠져나와 다른 국면으로 옮기는 것이 유리하다. 정부의 노력도 그런 방향으로 이뤄지는 것이 마땅하다.

 

박근혜 정부가 ‘알박기’ 해놓은 사드를 철회할 수 없었다면 다른 것을 얻어냈어야 한다. 그런데 정부가 사드 배치의 대가로 받은 것은 미사일 탄두중량 해제였다. 미사일 족쇄를 푸는 것은 자주국방 차원에서 한국에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일에는 우선순위가 있다. 탄두중량을 늘리는 것이 지금 한국의 안보상황에서 그토록 시급한 일이었는가. 사드를 배치하는 대신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대담한 대북 접근법을 시도해보자고 미국을 설득하고 북핵 국면을 전환해 중국의 반발을 최소화하려는 시도는 왜 하지 못했는가.

 

송영무 국방장관은 지난달 30일 워싱턴에서 미국 정부 고위관계자들에게 “전술핵 배치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한국 내에 있다”고 전하면서 핵잠수함 도입 필요성을 말했다. 전술핵 배치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문재인 정부의 국방장관이 이렇게 말한 의도가 무엇인지는 짐작할 수 있다. 한국 내에서 일고 있는 전술핵 배치 주장을 누그러뜨릴 수 있도록 핵잠수함 도입에 동의해달라는 것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이었을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군비증강에 매달리는 이유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언제까지 미국에 의존해서 살 수 없으니 독자방위 능력을 향상시키겠다는 의도일 것이다. 하지만 사드를 배치하고 탄두중량을 늘리고 핵잠수함을 도입하는 식으로 군비를 늘리는 것이 한반도 위기를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지금 필요한 것은 북한이 핵을 버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지 남한에 무기를 쌓아 놓는 것이 아니다. 자주국방도 필요하지만 동북아 군비경쟁이 촉발되고 그 피해를 한국이 고스란히 받는 상황도 피해야 한다. 그 사이에서 적절하게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정부가 해야 할 일이다.

 

한 주간지 기자가 페이스북에서 ‘문 대통령은 지금 북한과 맞서기 위한 최소한의 수단을 확보하기 위해 미국의 가랑이 밑을 기고 있는 것’이라며 옹호한 적이 있다. 김경수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 글을 “문재인 대통령의 최근 통일·외교·안보 분야 행보에 대한 가장 정확한 분석”이라고 소개했다.

나도 문 대통령이 치밀한 계산속에 계획된 행보를 하고 있다고 믿고 싶다. 하지만 그동안 보여준 모습은 그런 믿음을 주기에는 너무 허술했다. 사드 배치 문제로 오락가락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급할 때는 말 바꾸기도 했다. 지난 6월 문정인 특보의 이른바 ‘워싱턴 발언’으로 논란이 일자 문 대통령은 “나는 선거 과정에서 한·미 연합군사훈련의 축소와 조정을 언급한 적이 없다”며 명백한 사실을 부인했다.

 

또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개인청구권이 남아 있다는 것이 한국 대법원 판례이며 정부도 그런 입장에서 과거사 문제에 임하고 있다”는 발언으로 파장을 일으킨 뒤 일본의 거듭된 해명 요구에 “이 문제는 한·일 합의에 의해 해결된 것”이라면서 자신의 말을 정정한 적도 있다. 섣부른 ‘레드라인’ 발언으로 혼란을 자초하는가 하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는 대북 원유수출 금지를 공개 요청했다가 거부당하는 일도 있었다. 특히 인권변호사 출신 한국 대통령이 독재자 푸틴에게 “그런 조치는 북한 주민을 다치게 한다”는 훈계를 듣는 장면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아프다.

 

문재인 정부가 최소한 외교안보 분야에서만큼은 철저히 준비된 정부가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상황은 박근혜 정부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당분간 더 나아질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가 지향하는 나라는 어떤 모습인지, 그것을 위해서는 어떤 외교전략을 가져야 하는지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볼 때가 됐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WRITTEN BY
KHross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이 없습니다.
secret

핵무기로 상대의 핵무기를 무력화시키고 전쟁을 막을 수 있을까. 북한의 6차 핵실험 감행 이후 북한의 위협을 상쇄시키기 위해 우리도 핵무장을 하거나 미국의 전술핵을 다시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도처에서 고개를 든다.

 

이 같은 주장을 가능케 하는 핵심적 근거는 ‘공포의 핵균형’이다. 상대를 절멸시킬 수 있는 능력을 서로 가짐으로써 심리적으로 상대의 선제공격을 제어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북한이 핵무장 국가가 됐으니 우리도 핵으로 무장해 심리적 공포상태의 균형을 이뤄야만 전쟁을 막을 수 있다는 논리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3일 1면에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핵무기 병기화 사업'을 현지지도했다는 기사와 사진을 게재했다. 노동신문 등 북한 매체들은 최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탄두로 장착할 더 높은 단계의 수소폭탄을 개발했다고 이날 보도에서 주장했다. 연합뉴스

 

이게 사실이라면 한국은 그동안 ‘동반 핵무장’이라는 지극히 간단한 방법으로 북핵 문제를 풀 수 있는 초간편 해법을 놔두고 20년 동안 헛수고를 한 셈이다. 또한 전쟁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도 아주 쉽다. 모든 나라가 핵무기를 하나씩 갖고 서로를 견제하면 세계 평화가 올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공포의 균형론’은 개념상으로만 존재하는 이론이며 지극히 제한적인 상황에서만 적용 가능한 비현실적 해법이기 때문이다.

 

핵무기가 전쟁을 막아주지는 않는다. 인도·파키스탄·이스라엘 등 핵보유국도 전쟁에 휘말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로 인류는 핵전쟁에 가장 가까이 서기도 했다. 1982년 포클랜드 전쟁은 핵무기가 없는 아르헨티나가 핵보유국인 영국을 상대로 일으킨 경우다. 핵을 갖고 있으면 전쟁을 막을 수 있다는 믿음은 잘못된 것임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들이다.

 

이론적으로나마 공포의 균형이 성립하려면 상대도 매우 냉철하고 이성적으로 사고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서른을 갓 넘긴 예측불가능한 지도자가 절대적 권력을 행사하고 국제질서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지구상에서 가장 고립된 나라와 이성적으로 교감하면서 균형을 이룰 자신이 있는가. 동반 핵무장은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북한과 똑같은 수준의 나라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는 것일 뿐 아니라 비핵화를 영구히 포기하는 것이며 분단을 고착화하는 길이기도 하다.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하고도 핵전쟁의 위험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핵전쟁은 면밀한 계산에 의해 벌어지지 않는다. 오판·우발적 충돌·사고 등으로 일어날 가능성이 훨씬 높다. 핵무기가 늘어날수록, 핵보유국이 증가할수록, 핵통제 체제가 느슨해질수록 핵전쟁 확률은 높아진다. 남북 동반 핵무장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공멸 가능성을 높일 뿐이다.

 

핵무장 주장은 날로 고도화되는 북한 핵프로그램에 대한 무력감의 다른 표현일 뿐 북핵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북핵 문제의 엄중함을 진실로 인식하고 있다면 충동적이고 무책임한 주장으로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들지 말고 국가의 미래를 위해 한번 더 숙고해줄 것을 당부하고 싶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simon@kyunghyang.com>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WRITTEN BY
KHross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이 없습니다.
secret

지난달 문재인 정부의 첫 한·미 정상회담 이후 국내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는 말 중 하나가 ‘한반도 문제에 대한 한국의 주도적 역할’이다. 한국에 사활적 문제인 북핵·북한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한국의 의지를 관철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한국의 주도적 역할 확보’를 한·미 정상회담의 최대 성과로 꼽는 데 별로 이견이 없다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그런데 ‘주도적 역할’을 한국 외교의 금과옥조이며 최대 가치인 것처럼 여기는 인식이 만연하는 상황은 왠지 불편하다. 화려한 겉모습에 비해 실제 내용은 빈약한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없지 않다. 남들이 다 잘했다고 하는 것을 한번 비틀어 보고 싶은 삐딱한 신문쟁이 근성 탓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 북핵·한반도 문제에서 한국의 존재감을 과시하는 데 주력한 나머지 내용 면에서는 손해를 본 경우가 많았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6일 오후(현지시간) G20 정상회의 참석차 독일을 공식 방문 중인 문재인 대통령이 주함부르크 미국총영사관 에서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한·미·일 3국 정상만찬에 앞서 인사를 나누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북한 문제에 관한 한 예나 지금이나 국내에서 가장 부정적인 현상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 ‘통미봉남(通美封南)’이다. 북한이 한국을 상대하지 않고 미국과 직거래를 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절대 용납되지 않는다.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 때는 합의문에 한국의 요구 사항인 ‘남북대화를 재개한다’는 문구를 포함시키는 문제를 놓고 북·미가 충돌해 다 된 협상이 거의 결렬 직전까지 갔다.

 

북핵 문제 해결 바이블로 불리는 9·19 공동성명에도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 있다. 한·미·중·일·러 등이 북한에 에너지 지원을 한다는 내용 뒤에 따라붙은 “대한민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200만킬로와트 전력 공급에 관한 2005년 7월12일자 제안을 재확인하였다”는 대목이다. 당시 정부가 교착상태에 빠진 6자회담을 재가동시키기 위해 북한에 제시한 이른바 ‘중대제안’에 대한 언급이다. 이 제안은 북한이 사실상 거부 의사를 밝힌 것이어서 협상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9·19 공동성명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과시하기 위해 자칫 에너지 지원 덤터기를 쓸 수도 있는 위험한 내용을 ‘재확인했다’는 애매한 표현으로 삽입시켰다. 이 문구를 넣기 위해 쏟아부은 외교적 자산과 문안 협상에서 ‘트레이드오프’ 등을 감안하면 이게 얼마나 부질없는 짓이었는지 알 수 있다.

 

북·미가 뭔가 접촉을 가질 기미가 보이면 한국이 소외되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 국내에서 어김없이 고개를 든다. 이명박 정부 시절 미국이 북한과 고위급 접촉을 통해 탐색적 대화를 시작하려 하자 정부는 남북대화가 먼저 선행되지 않으면 북·미 접촉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버텼다. 결국 아무 의미도 없는 억지춘향식 남북대화를 형식적으로 가진 뒤에야 북·미 대화를 시작할 수 있었다. 당시 이명박 정부가 미국의 발목을 잡지 않고 몇 개월만 빨리 북·미 접촉이 시작됐더라면 2012년 ‘2·29 합의’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사망 이전에 나왔을 것이고 북핵 문제 양상도 지금과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통미봉남은 최근들어 ‘코리아 패싱’이라는 약간 변형된 형태로 많이 유통되고 있지만, 한국이 북한 문제 논의에서 어떤 식으로든 소외되거나 판을 주도하지 못하면 큰일난다는 인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본질은 같다고 볼 수 있다.

 

한반도 문제에 주인의식을 갖고 대처해야 한다는 것은 백번 지당한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한국이 판을 좌지우지하면서 끌고 나가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한국은 그만 한 외교적 역량이 없다. 특히 한반도 문제가 국제적 이슈로 변하면서 한국 입지는 더 좁아졌다. 미·중·러 등은 한반도 문제를 서로 견제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기 때문에 한반도 사안은 강대국 패권 전략의 일부분이 되어가고 있다.

 

한국의 주도적 역할이란 정확히 말하면 강대국의 논의 구조 속에서 우리의 목소리가 실종되지 않고 국익에 반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는 것이다. 북핵 문제를 다루는 다자구도의 속성상 어느 한 나라가 주도권을 잡으려 하면 그 논의는 반드시 깨진다. 자신의 목소리를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자가 다자외교에서는 진정한 승자다. 한국처럼 강대국에 둘러싸인 외교 현실 속에서는 이 같은 태도가 더욱 절실히 요구된다. 남북관계에서도 북한에 끌려다니면 안되겠지만 우리가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각시키면 북한의 호응을 얻을 수 없다.

 

한국의 목표는 한반도 문제를 주도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이 문제가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도록 만드는 것이다. 평화를 정착시키고 비핵화 논의를 진전시키는 방향으로 한반도 문제가 진행될 수만 있다면 그 과정에서 한국의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부를 비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WRITTEN BY
KHross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이 없습니다.
secret

대통령 통일외교안보 특보인 문정인 연세대 특임교수의 ‘워싱턴 발언’은 새삼스럽지 않다. 발언 내용은 상식적이고 처음 나온 이야기도 아니다. 그럼에도 곧 국가 안보가 무너질 것처럼 과도한 반발이 나오고 있는 것은 문재인 정부에 대한 야당과 보수층의 공격이 일제히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다.

 

북한 핵·미사일 활동 중단과 한·미 군사훈련 규모 축소를 교환해 북핵 문제 해결의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다는 문 교수의 발언은 현재 가장 시급한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짚고 있다는 점에서 합리적이다. 북한 핵·미사일 위기의 심각성은 북한이 얼마나 진전된 핵무기를 갖고 있는지, 얼마나 멀리 날아갈 수 있는 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는지에 있는 것이 아니다. 북한이 지금처럼 아무런 제약 없이 자유롭게 핵·미사일 실험을 할 수 있는 무방비 상태로 방치돼 있다는 것이 진짜 위기이며 안보 위협이다.

 

핵·미사일 제거는 나중 문제고, 일단 더 이상 실험을 못하게 함으로써 ‘핵·미사일 능력 고도화’를 중단시키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 역주행하는 열차를 제 방향으로 되돌리려면 우선 열차를 멈춰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핵·미사일 활동 동결’과 이를 모니터링할 수 있는 체제만 확보될 수 있다면 군사훈련 규모를 축소하는 것보다 더 큰 ‘상응조치’를 제공하더라도 해야 한다. 그래야만 비핵화든 평화체제든 시간이 걸리는 논의를 시작할 수 있다.

 

문 교수 발언은 그가 평소 강연·언론기고 등을 통해 제시했던 구상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지난 4월 대선후보 초청 토론회에서 이 말을 했다. 지난달에는 미국의 고위 관계자 입에서 “북한이 핵·미사일 활동을 중지할 때까지는 대화할 수 없다”는 발언이 나왔다. 문 교수 발언은 이처럼 한·미 양측에서 수차례 제시됐던 내용을 한번 더 반복한 것뿐이며 미국의 입장과 배치되는 것도 아니다.

 

보수층의 느닷없는 비난은 합당한 근거가 없는 전형적인 정치공세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배치 문제에 대한 정부의 입장을 안보를 위협하는 친북 행위로 규정하고 미국이 이에 분노해 주한미군을 철수할 수 있다고 공갈을 퍼뜨리는 것은 이성을 잃은 행태다.

 

보수인사와 야당, 보수언론까지 합세한 대정부 공세는 뿌리 깊은 친미 사대주의와 색깔론으로 무장하고 있다. 이들은 문 대통령의 대미관·안보관을 ‘약한 고리’로 본다.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문재인 정부를 반미·친북으로 몰아세워 한·미 갈등을 부각시키고 정권에 흠집을 내려는 의도가 보인다.

 

문 교수는 문재인 정부 외교안보 정책 기조를 만든 사람이기 때문에 그의 발언은 정부가 지향하는 방향과 같다. 하지만 청와대는 보수층의 공격에 정면 대응을 피한 채 이번 사태가 한·미 정상회담에 미칠 영향을 우려한다. ‘문 교수 발언은 개인적 견해’라며 거리를 두고 문 교수에게 엄중하게 경고했다는 해명까지 곁들였다. 지난 세월 문 대통령에게 씌워졌던 지긋지긋한 ‘종북·좌파·반미 프레임’에 얼마나 시달렸는지 짐작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선거를 통해 집권한 정당한 권력이 야당과 미국을 너무 의식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청와대는 당초 염두에 둔 인물을 국가안보실장에 기용하지 못했다. 그 자리가 돌고돌아 결국 외교안보 경험이 많지 않은 정의용 현 실장에게 간 것도 미국을 의식한 결과다. 하지만 ‘사드 보고 누락’ 사태와 이번 문 교수 발언 파동에서 청와대 안보실이 보여준 미숙한 대응은 외교안보 컨트롤타워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충분한 준비 기간 없이 조기 한·미 정상회담을 추진해 외교부담을 자초한 것도 대미외교 공백을 서둘러 벌충하려는 조급함에서 빚어진 실책이다.

 

문 교수를 포함해 문재인 정부의 대외정책 기조를 정하고 공약을 만든 인사들은 지금 모두 물러났다. 외교부 장관도 이 분야에 경험이 없는 인물이다. 정부가 ‘개문발차’한 탓에 외교부와 주미대사관 등 관련 부처·기관에는 여전히 전 정부 관료들이 고위직에 있다. 문재인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이 정체성을 찾으려면 전열 재정비가 시급하다.

 

문재인 정부는 다른 정치세력과 손잡지 않은 촛불혁명의 산물이며 80%에 육박하는 지지율을 가진 강력한 정부다. 야당이든 미국이든 정공법으로 상대해도 거리낄 것이 없다. 한·미동맹은 국가 간 동맹이지 정권 동맹이 아니다. 정권이 바뀌고 정책이 달라졌다고 해서 흔들릴 체제가 아니다. 동맹이라고 해도 정책 우선순위와 안보 환경이 다른 개별 국가 간 관계에서 이견이 없을 수는 없다. ‘빛 한줄기 샐 틈 없는’ 동맹관계는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건강한 동맹관계는 한 치의 이견도 없어야 하는 관계가 아니라 이견이 생겼을 때 신속히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 관계여야 한다. 한·미 간 견해는 언제나 일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당당하게 국정과 대외정책을 펴 나가기를 바란다.

 

유신모 | 외교전문기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WRITTEN BY
KHross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이 없습니다.
secret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협정 체결. 남북 군비통제를 통한 전쟁 위협 제거. 남북 경제통합을 기초로 한 점진적 통일 지향. 실용적인 미·중·일·러 등 주변 4강 외교. 국방개혁 및 국방 문민화. 임기 내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대선후보 문재인’이 내세웠던 외교안보 분야 주요 공약이다. 한국의 외교안보 환경은 강대국이나 다른 평범한 국가와 다르다.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외부 변화에 적응하고 경쟁해야 한다. 이 공약들은 국가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자 목표다. 국민들이 선거에서 문 후보를 선택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문재인 대통령이 외교안보라인 인선을 발표하던 날 이 공약들을 다시 꺼내 읽어봤다. 임명된 사람들은 과연 문재인 정부의 공약을 추진할 적임자인가.

 

문재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보에 임명된 문정인 연세대 명예특임교수는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에서 햇볕정책과 평화번영정책에 대한 이론 구축 작업에 깊숙이 관여했던 저명한 국제정치학자이다. 정부와 학계 모두에서 실력을 인정받는 문 교수는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 개최 때 김대중 전 대통령을 수행해 평양을 방문하는 등 햇볕정책의 전도사 역할을 수행했다. 사진은 통일외교안보특보에 임명된 문정인 연세대 명예특임교수. 연합뉴스

 

청와대는 국가안보실장에 정의용 전 주제네바 대사를 임명했다. 여권의 ‘원조 외교관 출신’ 인사로 오랫동안 문 대통령과 여당을 위해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문재인 정부에서 예우를 받아 마땅한 인물이다. 외교부 장관에는 강경화 유엔 사무총장 정책특보를 발탁했다. 유엔 사무총장 3대에 걸쳐 중용된 다자외교의 실력자다. 하지만 이 인선에서는 문재인 정부가 지향하는 외교안보 정책을 추진해 나가기 위한 전략을 발견할 수 없다.

 

강경화 유엔 사무총장 정책특보 내정자

 

강 내정자는 외교부의 유리천장을 깬 사상 최초의 여성 장관인 데다 탁월한 실력까지 갖췄다. 더구나 그는 비(非)외무고시 출신이다. 외교부에 만연한 정치권 줄서기와 파벌, 순혈주의에 강한 충격을 줄 수 있는 인물이다. 대중들은 그를 외교장관에 임명한 것에 열광하고 있다. 그 하나만으로도 이번 외교안보라인 인선 전체를 ‘잘했다’고 평가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강 내정자는 지금 한국 외교가 맞닥뜨리고 있는 위기 상황과는 상관 없는 업무를 해온 인물이다. 유엔 업무는 한 나라의 생존전략을 다루는 개별 국가의 외교와 다르다. 그는 한국에 사활적 문제인 북핵과 한반도 정세에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중·일·러 등 주요국과의 양자 업무 등을 해본 적이 없다. 10년 이상 한국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국내 환경에도 익숙지 않다.

 

강 내정자는 훌륭한 외교관이다. 하지만 적재(適材)를 적소(適所)에 쓰는 것만이 인사의 전부는 아니다. 얼마나 적시(適時)에 기용하느냐도 매우 중요하다. 핵·미사일 능력을 극도로 키우고 있는 북한과는 아무런 긴장관리 장치가 없고, 중국·일본과의 관계는 최악의 상태에 빠져 있으며, 외교안보를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미국에 한·미동맹을 위협하는 언사를 일삼는 예측불허의 대통령이 앉아 있는 엄혹한 시기는 그를 외교장관으로 기용하기에 적절한 때가 아니다.

 

청와대는 강 내정자 인선 배경으로 다자외교에 익숙하고 국제인권분야 전문가라는 점을 들었다. 역시 납득할 수 없다. 다자외교를 잘못해서 한국 외교가 지금 이 지경이 된 것은 아니지 않은가. 또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인권 상황이 지적받는 이유는 선거 개입·언론 장악·간첩 조작·노동 탄압 같은 정부의 잘못 때문이지 외교장관이 인권에 무지해서가 아니다.

 

강 내정자 인선에 의구심을 표시하는 기자들의 질문에 청와대 측은 “외교는 장관(만)이 하는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컨트롤타워인 청와대가 리드하고 보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청와대 사정도 마찬가지라는 게 문제다. 정의용 신임 안보실장은 통상교섭조정관, 국제노동기구(ILO) 의장 등을 지낸 통상 전문가다. 그의 경력은 외교·통일·국방·정보 분야를 아우르며 외교안보 전략을 총괄하는 국가안보실장과는 거리가 멀다.

 

정부가 국가안보실 기능을 강화한 것은통일·외교·국방 정책을 통합관리하면서 국가전략을 지휘하는 인물이 필요하다는 판단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 자리는 현역에서 물러난 지 십수년이 지난 원로 통상관료 출신에게 돌아갔다. 청와대는 이 같은 약점을 의식한 듯 2명의 외교통일안보 분야 특보를 신설했지만 문 대통령이 가장 신뢰하는 외교안보 분야 전문가인 문정인 특보는 비상임이라 역할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고 홍석현 특보는 문 대통령과 국정철학을 공유하는 동지적 관계가 아니다. 안보실 차장 인사가 남아 있지만 이들은 실무자이지 국가전략을 짜는 사람은 아니다. 도대체 누가 청와대에서 외교부를 리드하고 보완한다는 말인가.

 

다시 ‘문재인 후보의 외교안보 공약’으로 돌아가 보자. 하나하나가 모두 사력을 다한다는 각오로 매달려도 될까 말까한 중대한 사안들이며 각각 유기적으로 연결된 고차방정식이다. 매 사안마다 넓고 높게 바라보고, 세밀하게 계산하고, 거칠게 싸우고, 끈질기게 설득해야 진전을 이룰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의 외교안보라인은 목표 의식을 갖고 난제를 해결하려는 인선이 아니라 환영과 찬사를 얻기 위해 안배와 외형 관리에 치중한 인선이다. 문재인 정부는 이 훌륭한 공약들을 그대로 내팽개칠 참인가. 아직 배가 출항한 지 2주밖에 지나지 않았다. 부디 초심을 잃지 않기 바란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WRITTEN BY
KHross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이 없습니다.
secret

2007년은 한국 외교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굵직한 일들이 벌어졌던 해이다. 신년 벽두에 베를린에서 날아온 크리스토퍼 힐 당시 미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와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의 양자접촉 소식은 ‘파란의 1년’을 예고하는 신호탄이었다. 양측은 이 접촉으로 꽉 막혔던 협상 재개의 물꼬를 텄다. 이어 ‘2·13 합의’가 나오면서 북핵 문제는 급진전됐다. 3월에는 김 부상이 뉴욕을 방문해 미국과 관계정상화 논의를 시작했다. 북한은 6월에 북핵 시설 불능화 작업을 모니터링할 국제원자력기구(IAEA) 실무단 방북을 수용했고, 7월에는 영변 핵시설 가동을 중단했다. 북한은 연내에 영변 핵시설을 불능화하고 핵신고서를 제출하기로 했으며 미국은 테러지원국 해제 시기를 저울질하기 시작했다. 2007년 한 해에만 4번의 6자회담이 열렸고 비핵화, 경제·에너지 지원, 관계정상화, 동북아 다자안보체제 구축 등을 논의하기 위한 실무그룹회의는 일일이 기억하기 힘들 정도로 많았다. 곧이어 북한이 핵신고서를 제출하고 검증·폐기에 착수하게 되면 한반도 비핵화는 되돌릴 수 없는 단계에 진입할 수 있었다.

 

지금 한국 대선판을 뒤흔들고 있는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 회고록의 ‘북한인권결의안 기권’ 문제는 이 같은 상황에서 일어났다. 이 문제를 거론하려면 북핵 문제의 마지막 ‘깔딱고개’를 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던 당시의 긴박한 상황과 그해 10월에 있었던 남북정상회담, 그리고 이에 대한 한국과 국제사회의 인식 차이 등에 대한 이해가 먼저 있어야 한다.

노무현 정부는 비핵화에 발맞춰 남북관계를 진전시키고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의 기반을 놓으려 했다. 이를 위해 추진한 것이 남북정상회담이었다. 문제는 정부가 남북정상회담을 비밀리에 추진하면서 외교부에는 알려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국 등 주변국들이 남북정상회담 추진 소식을 알게 되면 성사가 어렵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당시 한·미는 북핵 문제에 적극 공조하면서도 상대를 경계했다.

 

송민순 북한대학원대학교 총장이 24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외부로 나가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한편 송 총장은 이날 오전 총장 사직서를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연합뉴스

 

미국은 남북정상회담 소식에 매우 놀라면서 국제공조로 진행되는 비핵화 작업에 변수가 될 것을 우려했다. 중국은 남북정상선언에 포함된 ‘3자 또는 4자 정상들의 종전선언’ 구상에 분노했다. ‘3자 또는 4자’라는 야릇한 문구는 중국을 배제할 수도 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결국 남북정상회담은 남북관계에 또 하나의 이정표를 만들었지만 미국과 중국의 축복을 받지는 못했다.

 

당시 외교부는 이 같은 상황을 우려했다.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국제공조가 필수인데 임기가 몇 달 남지도 않은 정부가 미·중이 흔쾌히 동의하지 않는 남북정상회담을 기습적으로 가진 것이 국제공조를 어렵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정부가 남북정상회담 이후 북한과의 관계를 고려해 유엔 북한인권결의안 표결에서 기권하려고 하자 외교부는 더욱 난처해졌다. 불과 1년 전 북한의 핵실험을 이유로 인권결의안에 찬성했던 한국이 이번에는 남북정상회담을 이유로 다시 기권하면 국제사회로부터 인류보편적 가치인 인권 문제에 대한 입장이 국내정치 상황에 따라 오락가락한다는 비판을 받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당시 송 전 장관이 ‘장관직을 걸고’ 대통령에게 저항한 배경에는 이 같은 상황이 있었다. 회고록에는 그 내용이 비교적 소상히 담겨 있다.

 

이 책을 읽고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국제공조와 남북관계 진전을 위한 노력을 조화시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남북관계에서 원칙을 고수하는 것과 전략적 유연성을 갖는 것 중 어떤 것이 우선적인 가치인지 등을 생각한다면 ‘글의 요지’를 파악할 줄 아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 책이 나오자마자 당시 새누리당과 보수층은 유력 야당 대선후보를 흠집낼 거리가 있는지부터 찾았다. 그러곤 “인권결의안 표결 문제를 북한에 결재를 받아 처리했다”는 저열한 ‘색깔론’을 집어들었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의 대응도 실망스럽다. 그동안 보수 정치세력이 그에게 씌워온 지긋지긋한 ‘종북 프레임’에 위축돼 있음은 이해할 수 있지만 이 사안은 정공법으로 대처했어야 한다. 외교 카운터파트의 의중을 파악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당시에는 무수히 열려 있는 남북채널로 긴밀한 대화가 오가던 시절이어서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고 당당히 맞서지 못한 것은 그의 잘못이다.

 

송민순 회고록에서 제기된 남북관계와 비핵화 논의의 선순환, 남북관계 접근법에 대한 딜레마 등은 앞으로 어떤 정부가 들어서서 북핵 문제를 다루더라도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사안이다. 한반도 평화와 통일, 비핵화를 논하는 과정에서 이 문제를 피할 길은 없다. 하지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정치권의 공방을 보고 있으면 다음 정부에도 북핵 문제 해결에 관한 한 별로 기대할 것이 없어 보인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WRITTEN BY
KHross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이 없습니다.
secret

북한이 미사일에 장착할 수 있는 소형 핵탄두를 갖고 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견해가 엇갈리지만, 5차례의 핵실험을 통해 상당한 수준의 핵기폭장치와 기초적인 핵억지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북한의 핵개발이 시작된 이후 지금까지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한 나라는 하나도 없다. ‘북핵 불용’은 한·미뿐 아니라 중국·러시아를 포함한 전 세계가 유지하고 있는 기본 입장이다.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북한이 핵무기를 갖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외면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북한이 핵무기를 갖고 있는 한 정상적인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누려야 할 권리를 인정해서는 안된다는 ‘북핵 불용’이다. 따라서 국제사회가 북한이 갖고 있는 핵무기를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고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는다면 북한은 인도와 파키스탄처럼 ‘사실상의 핵보유국’이 된다.

 

가끔 ‘북한의 핵보유를 인정하고 협상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을 펴는 정치인들을 본다. 이 말은 형용 모순이다.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북한에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고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의 권리를 인정한다는 의미이므로 북한이 핵을 포기할 이유도 없고 협상을 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인정해야 할 것은 대화와 협상의 상대로서 북한의 국가적 실체이지 핵보유국 지위가 아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이 11일(현지시간) 미국 플로리다주 팜비치 마라라고 리조트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북한 탄도미사일 발사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팜비치 _ AFP연합뉴스

 

이 대목에서 북한에 대한 제재가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인지 명확해진다. 북한에 대한 제재가 느슨해지면 그것이 곧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이 핵을 갖고 있는 한 제재는 절대 중단되어서는 안된다.

 

북핵 문제가 불거진 이후 국제사회는 북한에 지속적인 제재를 가하고 있다. 국제법적 지위를 갖는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제재 결의가 줄줄이 이어지고 각국의 독자 제재도 날로 강화되고 있음에도 북한은 핵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대북 제재의 효용성은 심하게 의심받고 있다. 중국이 뒷문을 열어주고 제재의 효과를 반감시키고 있기 때문에 대북 제재는 소용이 없다는 인식도 널리 퍼져 있다.

 

하지만 제재의 효과는 분명히 있다. 제재가 없었다면 북한은 일찌감치 핵강국이 됐을 것이다. 북한이 핵개발에 착수한 지 수십년이 지나도록 아직 완전한 핵억지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것은 지속적인 제재 강화로 핵관련 장비·기술 이전을 차단하고 경제적·정치적 제약을 가해온 결과다. 제재는 시간이 지날수록 고무줄처럼 조여오는 특성이 있다. 빈틈을 찾아가면서 견뎌낼 수는 있지만 벗어날 수는 없다. 특히 북한처럼 전방위적 제재를 받고 있는 상태가 유지된다면 핵무기를 아무리 많이 가져도 정상적인 국가가 될 수 없다.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 의지가 약화되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경각심을 높이는 것은 북핵 당사국인 한국의 책무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제재가 북핵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북한이 손익계산을 따져 핵무기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다른 길을 선택하도록 만드는 것은 결국 서로 필요한 것을 주고받는 협상이다. 제재는 상대를 대화 테이블로 끌고 나오고 유리한 입지에서 협상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 협상을 염두에 두지 않은 맹목적 제재로 핵을 포기하게 만든다는 것은 환상이다.

 

지금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는 대북정책을 재검토하고 있다. 모든 옵션이 테이블에 올려져 있다고 말한다.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는 것부터 대북 선제타격, 전술핵 재배치, 미·중의 전략적 결정에 의한 해결 등등을 모두 모색한 뒤 결정하겠다는 의미다. 하지만 선택지는 많지 않다. 테이블에 올려진 모든 옵션에서 불가능한 것을 하나씩 제외시키는 ‘네거티브 셀렉션’을 반복하다 보면 결국 현실적인 대안이 남을 수밖에 없다.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해 국제비확산체제를 무너뜨릴 수도 없고 막대한 인명피해가 따르는 전면전을 감수하고 선제타격을 선택할 수도 없다. 만일 미국이 이 같은 극단적 선택을 한다면 국제사회와 한국이 이를 뜯어말려야 한다. 결국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정책 역시 ‘제재와 협상의 병행 추진’이라는 기존의 범주를 완전히 벗어나기는 어렵다. 굳이 차별화를 꾀한다면 ‘더 강력한 제재와 더 적극적인 협상’ 정도가 될 수밖에 없다.

 

북핵 문제를 한 방에 해결해 줄 ‘실버 불릿’은 없다. 지금까지의 북핵 접근법이 실패를 거듭한 이유는 획기적인 방법을 찾지 못해서가 아니다. 제재와 협상 중 하나만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방식으로 정책의 연속성을 유지하지 못한 탓이며 북핵 당사국 간의 일치된 대응을 이끌어내기 위한 외교력과 인내심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합리적 해결책은 ‘제재와 협상’이라는 상식적이고 약간은 진부해 보이는 틀 안에만 있다. 조만간 들어설 한국의 새 정부와 트럼프 행정부가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 심정으로’ 차분하고 인내심 있게 북핵 문제에 접근하기를 바란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WRITTEN BY
KHross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이 없습니다.
secret

- 2월 1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수년 전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의 대통령선거 출마설이 본격적으로 제기될 때 모든 정치부 동료들은 그가 결국 대선에 출마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정치 권력에 최우선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들의 시각으로는 대권을 마다할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처럼 보이지만, 세상에는 다양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하고 권력이 아닌 다른 것에 삶의 목표를 둔 사람들도 많다고 반박했다. 그리고 반 전 총장은 ‘세계 최고의 외교관’이라는 명예를 권력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할 것이므로 출마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나의 예측은 틀렸다. 그는 설마설마하는 사이 정치 행보를 노골화하더니 사무총장 임기가 끝나자마자 정치판에 뛰어들었다. 측근들은 이를 ‘시대적 소명(召命)’이라고 했다. 반 전 총장이 나섰다기보다 시대가 그를 정치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소명 의식이 있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일단 그의 권력 의지는 충만해 보인다. 지난 세월 내가 알고 있던 반기문과 지금의 반기문 중 어떤 것이 진짜 모습인지 혼란스럽다. 정치적 이념과 그의 현실적 성공 가능성 여부 등은 모두 제쳐놓고, 나는 여전히 그의 선택이 아쉽고 안타깝다.

 

반 전 총장과 정치적 성향을 달리하는 사람들은 그가 출마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이유 중 하나로 ‘유엔 사무총장은 퇴임 직후 자국 정부의 직책을 맡는 것을 삼가야 한다’는 1946년 유엔총회 결의안을 거론한다. 당시 국제사회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후질서를 만드는 데 유엔이 핵심적 역할을 할 것으로 생각했다. 유엔 사무총장이 각국의 지도자와 내밀한 이야기를 나누고 정보를 취득한 뒤 자국으로 돌아가 이를 활용하게 되면 곤란하다는 우려 때문에 이 결의안이 생겼다.

 

하지만 유엔은 그런 막강한 권한을 가진 기구가 되지 못했다. 유엔 사무총장도 강대국 간 이해관계의 균형을 유지하는 역할에 머물렀다. 유엔 사무총장의 권한과 이점을 자국 정치에 활용할 것에 대한 우려는 기우로 드러났고 결의안은 유명무실해졌다. 이처럼 구속력도 없고 의미도 퇴색한 낡은 결의안을 들이대면서 ‘대선에 출마하면 안된다’고 정색을 하고 싶지는 않다. 이 결의안 말고도 반 전 총장이 출마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들자면 족히 10가지는 댈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의 현실에 대한 반 전 총장의 인식은 절박하지도, 정확하지도 않다. 그는 지금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시대정신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통합’이라고 했다. 과연 그런가. 지금의 혼란은 정쟁이나 이념·세대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일찍이 청산했어야 할 비민주적 구태와 적폐를 키우고 키워온 결과다. 지금은 ‘이쯤 해두고 힘을 합치자’며 통합을 말할 때가 아니다. 맹렬한 자성과 혁신을 통해 구시대와 완전히 결별해야 할 때이며 정의와 상식이 작동하는 국가구조를 말할 때다. 반 전 총장이 말하는 대통합은 구태로 사분오열된 여당을 끌어모아 야권에 대항할 ‘통합 챔피언’이 되겠다는 의미인가.

 

유엔 사무총장으로서의 10년 경험을 살려 한국 정치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말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유엔 사무총장 경험을 살려서 활동해야 할 분야는 한국 정치가 아니라 세계사회운동이다. 반 전 총장은 한국 정치보다 국제적 현안 해결을 위한 노력에 최적화된 인물이다.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 상황은 인종·종교 갈등, 인권, 개발협력, 환경 등의 분야에서 나타난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출현으로 상황은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사안의 중요도로 따진다고 해도 국내 정치에 비할 바가 아니다. 반 전 총장이 유엔에서 내내 천착해온 기후변화 문제는 인류의 생존과 직결된 사안이다. 인류 공멸이라는 관점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면 남중국해 갈등이나 북핵 문제 같은 것은 ‘망망대해를 떠도는 한 조각 미풍’처럼 사소한 것일 수도 있다.

 

정치를 말하기 시작하면서 반 전 총장은 많은 상처를 입었다. 유엔 사무총장으로서의 업적은 지나치게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고, 전두환 독재 시절 김대중 전 대통령을 사찰했다는 오해는 사실로 굳어졌다. ‘자연인 반기문’이었다면 친근한 모습으로 받아들여질 사소한 실수 하나하나가 매서운 비판과 조롱의 대상이 됐다. 지금 그는 정치적 성향이 모호하다는 지적을 받으면서 모두에게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지만, 정치적 색깔을 분명히 하면 할수록 적은 늘어날 것이다. 또 그와 한편이 되지 못한 정치세력은 그를 사정없이 물어뜯을 것이다.

 

자신이 해야 하고, 또 잘할 수 있는 일을 제쳐두고 명분도 없는 낯선 싸움터에 뛰어들어 최소 50% 이상의 국민으로부터 비난과 조롱을 받게 되는 것이 하늘이 그에게 내린 소명일 리 없다. 반 전 총장은 진보·보수로부터 모두 인정받는 인물이 되는 것으로 한국 정치에 충분히 기여할 수 있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반 전 총장이 몸에 맞지 않는 정치의 옷을 벗어던지고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간다면 여전히 그를 존경할 용의가 있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WRITTEN BY
KHross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이 없습니다.
secret

시민단체가 부산 일본영사관 앞에 설치한 ‘평화의 소녀상’은 해당 구청의 철거와 압수, 시민들의 반발 등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다시 제자리에 놓였다. 소녀상을 그 자리에 설치하는 것이 도로법 시행령 위반임에도, 일본과 외교적 갈등을 겪게 될 것이 분명해 보임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소녀상 설치를 막지 못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도로점용 허가를 받을 수 없는 설치물인 소녀상을, 그것도 일본영사관 출입문에서 불과 30m 떨어진 담장 앞에 세우는 것은 바람직한 행동이 아니다. 하지만 부산 동구청이 소녀상을 강제 철거하자 전 국민이 들고일어났다. 한국 국민들의 법질서 의식이 약해서가 아니다.

 

국제 관행을 무시할 만큼 예의가 없기 때문도 아니다. 2015년 12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해결을 위한 한·일 정부 간 합의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굴욕적이고 일방적인 위안부 합의가 없었다면 시민단체가 일본영사관과 지근거리에 소녀상을 설치하는 ‘과격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부산 동구청은 시민들의 기세에 눌려 소녀상 설치를 허용했다. 관청이 불법 설치물을 허용하는 모순을 해소하기 위해 소녀상을 공공조형물로 등록하도록 하는 고육책도 추진 중이다. 이처럼 소녀상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끄러운데 정작 위안부 합의의 주체인 정부는 힘도 권한도 없는 일개 구청을 총알받이로 내세워놓고 비겁하게 그 뒤로 숨어버렸다.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 옆에 꽃다발과 화분이 놓여 있다. 이준헌 기자

 

정부는 소녀상을 일본영사관 앞에 설치하는 것에 반대한다. 한·일관계를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된다”고 말할 용기는 없다. 외교부는 지난달 30일 이 문제에 대해 “외교공관 보호에 관련된 국제 예양(禮讓) 및 관행이라는 측면에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적절한 장소에 대해 지혜를 모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는 공식 입장을 냈다.

 

정부가 말하는 ‘국제 예양 및 관행’이란 ‘영사관계에 관한 빈 협약’을 의미한다. 이 협약 22조 2항에는 “접수국(한국)은 파견국(일본) 공관의 안녕 교란, 품위 손상 방지를 위해 모든 적절한 조치를 취할 의무를 갖는다”고 돼 있다. 실제로 일본 측은 이 협약을 근거로 한국에 소녀상 이전을 요구하고 있다.

 

소녀상이 일본의 품위를 손상시키는 것인지, 위해를 유발할 수 있는 시설인지 등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없다. 또 협약에 저촉되지 않으려면 공관에서 얼마나 떨어진 곳에 소녀상을 설치해야 하는지에 대한 규정도 없다. 일각에서는 외국공관 100m 이내에서 시위를 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을 원용해 100m를 합리적인 거리로 보기도 하나 정해진 것은 아니다. 결국 협약 위반 여부는 적용하기 나름이고 정부의 판단에 달려 있다.

 

정부가 국제 관행을 내세워 사실상 소녀상 설치에 반대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부가 부산 일본영사관 앞의 소녀상과 서울 주한 일본대사관 앞의 소녀상이 비엔나 협약 위반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아니다. 정부가 일본의 소녀상 이전 요구에 대해 “민간단체의 일에 정부가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것만 봐도 비엔나 협약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정부는 비엔나 협약을 걸고 넘어질 생각이 없으면서도 ‘외교 문제가 될 수 있으니 다른 데로 옮겨달라’고 요구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이고 있는 셈이다.

 

정부는 위안부 합의에 대해 ‘역대 어느 정부도 해내지 못했던 최선의 결과’라고 강변하고 있다. 하지만 위안부 합의의 적나라한 실상은 일본과 시민단체의 눈치를 보며 전전긍긍하고 있는 정부의 곤궁한 모습이다. 정부가 소녀상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다. 일본에 추가 협상을 제의하는 것이다.

 

기존의 위안부 합의는 심각한 결함을 갖고 있다. 특히 위안부 문제에 대한 법적 책임 부분을 좀 더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일본이 법적 책임을 명시적으로 인정하도록 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최소한 정부 차원에서 공개적으로 부인하지는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야 한다. 한국이 “일본이 지급한 10억엔은 배상금”이라고 명시적으로 말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일본이 “배상금이 아니다”라고 공개적으로, 반복적으로 말할 수 있는 합의를 했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여기에 일본 총리의 사과 서한을 피해자들에게 전달하는 추가 조치를 더한다면 국민들을 설득할 수 있는 최소한의 요건은 갖출 수 있다.

 

정부는 추가 협상을 일본이 거부할 경우 ‘국민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기존의 합의에는 더 이상 구속되지 않겠다’고 선언할 수 있는 결의를 가져야 한다. 추가 협상 제의나 기존 합의 무효 선언이 외교적 부담을 가져올 수 있겠지만, 그것은 대일외교에 실패한 박근혜 정부의 업보로 받아들여야 한다. 국가적 자존심과 바람직한 한·일관계의 미래를 위해 차기 정부가 감내할 수밖에 없다.

 

유신모 | 외교전문기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WRITTEN BY
KHross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이 없습니다.
secret

외교부는 지난 1일 “국내 정세가 혼란스럽지만 주요 외교·안보 사안은 흔들림 없이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박근혜 정부 ‘비선 실세’ 최순실씨의 국정농단 의혹에 따른 파문이 외교·안보 분야까지 확대되면서 한국의 대외정책 기조에 대한 불신이 커질 것을 의식한 발언이다. 외교부는 또 윤병세 장관 명의로 ‘우리의 외교·안보 태세와 경제상황에 대해 국제사회에 불필요한 우려가 확산되지 않도록 정부 주요 정책이 정상적으로 추진되고 있음을 적극 설명하라’는 내용의 전문을 재외공관에 발송했다.

 

‘흔들리지 않겠다’는 외교부의 다짐은 역설적으로 지금 흔들리고 있거나, 흔들릴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방증이다. 국정 기능이 마비되고 정치가 혼수상태에 빠졌는데 국내 정치와 표리의 관계인 외교가 제대로 작동할 리 없다. “그동안 외국과 현안을 협의할 때 정부로부터 받았던 훈령은 도대체 누구의 훈령이었는지 혼란스럽다”는 외교부 관계자의 말을 농담으로 치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최순실 사태는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지금까지 외교·안보 분야에서 일어났던, 상식과 잘 부합하지 않는 모든 일들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박 대통령의 대북정책 골격을 완성한 것으로 알려진 최대석 이화여대 교수가 정권 출범도 하기 전에 대통령직인수위원을 사퇴한 것을 시작으로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깜짝 인사’가 줄을 이었다. 외국 사절 접견, 정상회담, 각종 대외 연설에서 대통령의 발언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이례적 언급이 계속됐지만 누가 이 같은 발언요령을 청와대에 제공했는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박 대통령은 취임 초기부터 턱없이 강경한 대일 자세를 고수하다가 하루아침에 대일 유화책으로 선회하더니, 결국 국민 정서를 완전히 배반하는 일본군 위안부 합의를 가져왔다.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내세우다가 뜬금없이 ‘통일 대박’을 외치고 “북핵 문제의 궁극적 해결은 통일”이라는 말로 모든 사람을 혼란스럽게 하기도 했다. 중국 전승절 기념일에 톈안먼 망루에 올라 열병식을 참관하는 깜짝 이벤트를 벌이고 곧이어 미국 펜타곤을 방문해 공고한 한·미동맹을 과시하는 오락가락 외교를 선보였다.

 

지난 3년8개월 동안 지인들로부터 ‘지금 대통령의 외교·안보 정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을 수도 없이 받았다. 나 자신도 이게 가장 궁금했던 터라 수없이 많은 사람을 상대로 확인해봤지만 지금까지도 답을 얻지 못하고 있다.

 

이 모든 사안에 최씨가 개입했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다. 하지만 지금 최씨는 그동안 명쾌히 설명되지 않은 모든 의문의 배후인 것처럼 인식된다. 개성공단 폐쇄, 사드 배치, 국방부 무기 도입 등에도 최씨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의혹이 제기된다. 만약 사실이 아니라면 청와대로서는 억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원래 마을에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면 평소 행실이 나빴던 자가 의심받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최순실 사태로 인한 가장 큰 국가적 피해는 외교·안보 분야에서 발생할 수 있다. 이미 외교무대에서 한국의 발언은 존중을 받기 힘든 상태가 됐다. 기독교와 무속이 뒤섞인 정체불명의 주술적 종교가 최고 통치자의 눈을 가리고 정치권의 어두운 세력과 결탁해 국정을 좌지우지하면서 닥치는 대로 욕망을 채운 전근대적 사건이 벌어지는 ‘신정체제’ 국가와 정상적인 외교가 가능할 것이라고 믿을 나라는 없다. 한국이 진정으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가치와 신념을 공유하고 있는 나라인지도 확신하기 어려울 것이다.

 

한국의 외교 상대국들은 지금까지 있었던 한국과의 외교를 의심할 것이고 앞으로 벌어질 외교는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당장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체결 논의에서도 이 같은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다. 일본과 미국은 이 협정을 연내에 마무리짓겠다고 나선 박근혜 정부의 결정을 반기면서도 “진짜 할 수 있겠느냐”며 의구심을 나타낸다.

 

지금 한국의 외교적 환경은 매우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 중국은 시진핑(習近平) 1인 지배체제를 선언하면서 대변혁을 예고하고 있고 일본의 우경화를 주도하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장기집권의 틀을 마련했다. 북한은 핵능력을 비약적으로 키우면서 때를 기다리고 있다. 미국은 다음주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한다. 미국의 새 대통령은 박근혜 정부의 마지막 1년을 함께하게 된다.

 

미국의 새 행정부가 북한 문제를 포함한 아시아정책의 틀을 만들어 나갈 내년 1년은 동북아시아에 가장 역동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시기다. 한국에도 외교적으로 가장 중요한 시기다. 한국은 이 결정적 순간을 ‘식물정부’와 함께 맞아야 한다. 운명이라면 지나치게 가혹한 운명이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WRITTEN BY
KHross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이 없습니다.
secret

북한이 올해에만 2차례의 핵실험과 20회가 넘는 중장거리 미사일 발사실험을 감행하고 있는 것은 수십년간 매달려온 ‘핵무력 체계 완성’의 끝이 서서히 보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북한은 지금처럼 국제사회가 북한 문제에 손을 놓고 있는 기회를 활용해 핵무장으로 가는 마지막 고비를 넘으려 할 것이다. 적어도 미국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새 행정부가 북한 문제에 관여하기 시작할 때까지는 북한의 핵 폭주를 막을 현실적 방법이 없어 보인다.

 

이대로라면 북한의 핵개발 저지를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은 실패로 끝나게 된다. 박근혜 정부도 그토록 기다려왔던 북한 정권의 붕괴보다 핵무기와 투발수단을 모두 갖춘 ‘핵무장국 북한’의 출현을 먼저 보게 될 것이다. 북한의 ‘핵전력화’가 눈앞으로 다가온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국민의 안위를 걱정하는 정상적인 정부라면 무엇보다 먼저 군사적 충돌을 막는 일에 매달릴 것이다. 남북은 현재 모든 소통 채널이 끊긴 상태에서 험악한 말폭탄을 주고받고 있다. 사소하고 우발적인 충돌이 연쇄 상승작용을 일으켜 대규모 교전으로 확대될 위험성이 있다. 또한 미국은 한국에 대한 확장억제 제공을 재확인하며 선제타격 옵션을 테이블에서 치우지 않고 있다. 전쟁이 일어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태다. 핵과 핵이 부딪치는 상황은 재앙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따라서 지금으로서는 전쟁 방지를 위한 군사적 소통 채널과 통제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가 느슨해지지 않도록 조이는 일도 중요하다. 북한의 최종적 목표는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받는 것이다. 핵보유국 지위 인정 여부는 제재와 직결된 문제다. 핵을 갖고도 제재를 받지 않는 상태가 된다면 그것이 곧 핵보유국의 지위를 얻는 것이며 ‘핵·경제 병진노선’의 성공이다. 따라서 국제사회가 제재를 포기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경각심을 갖게 하는 외교가 필요하다.

 

궁극적으로 핵을 포기하지 않고는 정상적인 국제사회의 일원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북한이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당장 북한을 아프게 하는 제재가 아니더라도 촘촘하게 빈틈을 막는 작업이 지속적으로 유지되어야 한다.

 

북한이 비핵화로 돌아오도록 유도하는 접근법도 포기해서는 안된다. 이를 위해서는 협상의 발판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제재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 좌우 한 짝씩 갖춰야 비로소 한 켤레의 신발이 되는 것처럼 제재와 협상은 함께 가야만 쓸모가 있다. 협상이 병행되지 않으면 제재의 정당성도 높이기 어렵다. 

 

군사적 충돌 방지 체제를 만들고, 제재를 넓고 촘촘하게 확대하고, 제재와 협상을 병행하는 이런 조치들은 사실 새로운 것도 획기적인 것도 아니다. 북한 핵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생각했던 방안이다. 지금 전 세계 전문가들이 내놓는 모든 북핵 해법 제언도 이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문제는 모든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것을 한국 정부가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통령은 북한 주민에게 탈북을 권유하면서 북한 정권 자체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있고 외교부 장관은 북한을 국제사회에서 축출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군사적 긴장 완화는 고사하고 오히려 충돌을 부추기는 듯한 태도로 국민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출구를 열어놓지 않고 제재와 압박에 매달리는 것은 협상 재개가 아닌 북한 체제 붕괴를 목표로 하고 있는 것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 

 

박근혜 대통령은 북한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통일이라고 여러 차례 언급했다. 하지만 이 말은 “북한 문제에 아무런 대책이 없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북한을 붕괴시켜 북핵·인권 등 모든 문제를 한 방에 해결하려는 것은 망상이다.

 

북한과의 협상은 엄청난 인내를 필요로 한다. 험난하고 까마득하게 먼 길을 한 발자국씩 옮기는 작업이다. 입만 열면 ‘무자비한 타격’ ‘잿더미’ 운운하는 새파랗게 젊은 독재자와 대화하는 것이 역겹다고 느끼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길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는 엄혹한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북한 체제 붕괴는 당장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전쟁은 공멸의 길이다.

 

‘악마와의 식사를 위해 긴 숟가락을 준비하라’는 영국 격언이 있다. 때로는 불가피하게 악마와도 마주 앉아 대화를 해야 할 때가 있다는 의미다. 국가의 미래와 국민의 안위를 위해서 하는 일인데 상대가 김정은이어서 대화를 못하겠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WRITTEN BY
KHross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이 없습니다.
secret

일본 정부가 31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지원을 위해 설립된 ‘화해·치유재단’에 10억엔을 송금함에 따라 지난해 12월28일 한·일 정부 간 위안부 합의는 사실상 이행됐다. 앞으로 위안부 피해자 문제가 양국 정부 간 현안으로 불거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일본의 10억엔 송금 완료는 그동안 양국관계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현안이었던 위안부 피해자 문제가 공식적으로 종료됨을 의미한다. 1991년 8월14일 위안부 피해자였던 고(故) 김학순 할머니가 자신의 경험을 처음으로 공개 증언해 이 문제가 세상에 알려진 지 정확히 25년 만이다.

 

하지만 위안부 합의 이전과 이후를 비교해 봐도 일본은 달라진 게 없다. 일본은 위안부 문제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이미 해결된 사안이며 10억엔은 배상금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은 여전히 인정하지 않고 있고 법적 책임이 없다는 입장도 불변이다. 피해자들에 대한 진정한 사죄는커녕 미안한 기색도 없다. 지난해 위안부 문제 한·일 합의 직후 “잃은 것은 10억엔뿐”이라고 말했던 일본은 지금 “10억엔 송금으로 이제 일본이 해야 할 의무는 다했다”고 말한다. 일본은 앞으로도 여전히 위안부 문제에 대한 ‘망발’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반면 한국에는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합의에 따라 위안부 문제는 ‘최종적·불가역적으로’ 해결됐기 때문에 정부는 이에 관한 문제제기를 할 수 없다. 국제사회에서 위안부 문제로 일본을 비판하는 것도 자제해야 한다. 게다가 일본은 앞으로 틈만 나면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있는 ‘평화의 소녀상’을 이전하라고 한국 정부를 닦달할 것이다.

 

정부는 10억엔에 ‘배상금의 성격’이 포함된 것이라고 설명해왔다. 그렇다면 정부에 묻고 싶은 게 있다. 이제 정부는 일본이 위안부 문제에 대한 법적 배상의 의무를 다한 것으로 간주할 텐가. 2011년 헌법재판소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정부가 노력하지 않고 있는 부작위(不作爲)는 위헌’이라고 결정한 효력도 이젠 소멸된 것으로 봐야 하는가.  외교부에 이에 대한 공식 답변을 요청한 지 열흘이 지났지만 답을 받지 못했다.

 

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대한 법적 책임을 스스로 인정하도록 만드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해방 이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부터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현대사를 지금 와서 모두 뒤집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일본이 합의문에 잉크도 마르기 전에 위안부 강제동원의 근거가 없다고 부정하고, 법적 배상 책임은 원래부터 없었다고 하고, 10억엔 줬으니 이젠 이 문제를 더 이상 꺼내지 말고 소녀상이나 치우라고 큰소리칠 수 있도록 면죄부를 준 합의를 받아들일 수는 없다.

 

이제 남은 것은 화해·치유재단이 10억엔을 피해자들에게 나눠주는 일뿐이다. 정부는 이미 생존자에게 1억원, 사망자 유족들에게 2000만원 규모의 현금을 지급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위안부 피해자가 245명이며 이 중 생존자가 40명이니 이들에게 돈을 나눠주면 기금 대부분이 소진되고 재단은 조만간 문을 닫아야 한다.

 

결국 이 재단은 배상금의 성격을 희석시키기 위해 일본 정부 대신 피해자들에게 돈을 전달하는 창구 역할을 하고 사라지는 ‘떴다방 돈세탁 재단’이나 마찬가지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뀐 듯한 이 같은 어이없는 합의는 ‘박근혜 외교’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잘 보여준다. 한·일 위안부 합의는 박근혜 외교의 철저한 실패가 낳은 부산물이다. 박 대통령은 취임 초기부터 한·일관계를 전략적으로 다루지 않고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일본을 상대하지 않겠다는 식의 강경한 대일 자세를 보이며 스스로 퇴로를 차단했다.

 

하지만 미국이 일본을 앞세우고 한국을 동참시켜 중국을 견제하려는 ‘아시아 재균형 정책’을 펴는 마당에 이 같은 대일 강경기조는 애초부터 오래 유지될 수 없는 자충수였다. 결국 궁지에 몰린 박 대통령은 일본의 요구가 모두 관철된 합의문에 동의해주고 위안부 문제에서 벗어났다. 그 부담은 고스란히 위안부 피해자와 국민들에게 돌아왔다.

 

위안부 문제는 이렇게 한·일 정부 간 현안의 목록에서 지워졌다. 하지만 역사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위안부 문제와 같은 반인도주의적 범죄는 인류보편의 가치를 담은 국제인권법에 의해 다뤄지기 때문에 해당 정부 간 합의로 종료될 수 없다.

 

위안부 문제 해결은 진실을 규명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사죄와 용서, 화해가 이어져야 비로소 종료됐다고 말할 수 있다. 정부는 그 작업을 포기했다. 25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다시 시민사회의 몫이 됐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WRITTEN BY
KHross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이 없습니다.
secret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하지 않은 핵강국 인도를 국제적 핵통제 제도에 편입시키는 것은 핵비확산체제 강화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아니면 NPT 체제를 오히려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까. 요즘 국제 비확산계에서는 인도의 원자력공급그룹(NSG) 회원국 가입 문제를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이 문제는 북핵 문제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한국에도 매우 중요한 사안이다.

 

NSG는 핵 관련 물품·장비의 수출에 대한 모든 것을 규율하는 통제체제다. NPT 규약만으로는 핵확산을 막기 어렵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이를 보완하기 위해 1978년 미국과 캐나다 등이 주도해 NSG를 설립했다. 현재 한국을 포함한 48개국이 회원국이다.

 

NPT에 가입하지 않은 핵보유국 인도의 NSG 가입을 허용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더욱이 1974년 인도의 핵실험이 NSG를 탄생시킨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아이러닉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지난달 20~24일 서울에서 열린 제26NSG 총회에서도 이 문제는 가장 뜨거운 이슈였다. 미국과 중국으로 대표되는 찬반 양론이 격돌하면서 결론을 내지 못했지만 논란은 더욱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인도의 가입을 강력히 지지하는 미국의 논리는 현실론이다. NPT 장외에서 코끼리처럼 덩치 큰 핵보유국으로 남아 있는 인도를 그대로 두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에 국제 비확산체제에 끌어들여 통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인도가 핵확산 전력이 없는 신뢰할 만한 모범국가라는 점을 강조한다. 반면 중국은 인도를 NSG에 받아들이면 다른 나라의 핵개발을 막을 명분이 없어지고 NPT 체제를 위험에 빠뜨릴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인도를 NSG에 가입시킬 경우 역시 NPT 비가입국이면서 사실상의핵보유국인 파키스탄 같은 나라도 동등하게 대우해줘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운다.

 

이들의 주장에는 전략적·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다. 미국은 인도의 원자력시장을 선점하고 인도와의 전략적 협력을 통해 중국을 견제하려는 지정학적 필요에 따라 움직인다. 중국은 이에 맞서기 위해 파키스탄을 끌어들여 미국을 견제하는 중이다.

 

논란의 시발점은 2005년 미국과 인도의 원자력협정이다. 조지 W 부시 미국 행정부는 NPT 비가입국과 핵거래를 하지 않는다는 기존 정책을 깨고 이 협정을 강행해 인도 시장 진출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로 인해 핵통제 국제규범이 약화되고 남아시아의 긴장을 고조시킬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지만 미국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핵기술 발전에 따라 원칙도 변해야 하며 NSG의 문호를 넓히는 것이 확산 방지에 긍정적일 수 있다는 미국의 주장은 일리가 있다. NPT 비가입국이 NSG 회원국이 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합법적 핵보유국인 프랑스도 NPT보다 NSG에 먼저 가입한 전례가 있다. 하지만 인도의 예외를 인정하게 되면 파키스탄·이스라엘·북한에도 할 말이 생긴다. 인도를 받아들임으로써 NPT 체제에 균열이 생기고 세계 안보는 더욱 불안해질 수 있다는 중국의 주장에 명료하게 반박하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 북한은 이번 사태를 예의주시할 것이다. 인도처럼 군수용과 민수용 핵시설을 구분하고 핵무기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민간 분야 핵협력의 길을 열 수 있다면 그것이 곧 ·경제 병진노선의 성공이며 핵보유국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미국은 북한에 우리와 친해지려면 핵을 버려야 한다고 말하지만, 북한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논란을 지켜보면서 미국과 친해지려면 핵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굳힐 것이다.

 

인도의 NSG 가입이 비확산체제에 도움이 되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렇다면 보다 근본적인 문제로 돌아가야 한다. 지금 이 문제로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미··인도·파키스탄 등은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TBT)을 비준하지 않음으로써 20년째 이 조약이 발효되지 못하고 있는 것에 책임이 있는 나라들이다. 핵확산 방지의 기초가 되어야 할 핵분열물질생산금지조약(FMCT)도 이들의 이해관계 싸움에 말려 20년이 넘도록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NPT 체제가 지금까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이 체제가 공정하고 흠결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핵보유국이 권리를 인정받는 대신 핵실험금지·핵감축·비보유국의 안전 및 평화적 핵이용 보장 등을 약속했기 때문에 NPT 체제는 무기연장될 수 있었다. 하지만 핵강국들은 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다. 이들이 진정으로 비확산체제 강화를 원한다면, 지금 인도의 NSG 가입 문제로 싸울 것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부과된 의무를 얼마나 성실히 이행하고 있는지 먼저 자문해 봐야 한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WRITTEN BY
KHross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이 없습니다.
secret

정부가 우리나라의 공적개발원조(ODA)와 관련된 사안을 설명할 때 빼놓지 않는 단어가 ‘원조선진국’이다. 한국이 2009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산하 개발원조위원회(DAC)의 24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하지만 한국이 원조선진국다운 ODA 정책을 갖고 있었던 적은 없다.

ODA는 빈곤국의 사회·경제 발전을 위해 지원하는 공적자금이다. ODA는 제국주의 시절 서구 열강들이 식민지에서 더 많은 이익을 뽑아내려면 현지 개발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시작됐다. 착취의 개념에서 출발한 것이다. 착취가 됐든, 교역이 됐든 상대국이 발전하고 규모가 커져야 이익이 많아진다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에 식민지 독립 이후에도 개발원조는 필요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서유럽 재건을 위해 실시한 ‘마셜 플랜’은 현대적 개발협력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이 역시 공산주의 팽창을 막기 위한 전략적 정책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시간이 흐르면서 ODA는 달라졌다. 이제는 모두가 행복하게 잘 사는 세계를 만드는 것을 지향한다. 기술과 자본만을 제공하던 단계를 넘어 효율성과 자립, 교육, 거버넌스 등이 중요해졌다. 현대의 ODA는 빈곤퇴치, 평등, 인권, 인도주의 등 인류 공동번영 이상을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2000년 유엔은 빈곤감소·보건·교육·환경 등의 분야에서 2015년까지 달성할 8개의 목표를 설정해 ‘새천년개발목표(MDGs)’로 채택했고, 지난해부터는 ‘지속가능한 발전목표(SDGs)’ 17가지를 제시했다. SDGs는 ‘누구도 뒤처지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세계가 함께 고민해야 할 도전과제와 이행방안을 담고 있다. 이젠 개발협력이 인류의 미래를 위한 세계 전체의 의무가 됐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한국 ODA는 어떤 과정을 거쳤을까. 초창기 한국 ODA는 경제적 이득을 위한 것이었다. 무상원조가 아니라 장기 양허성 차관을 제공하는 유상원조가 절대적으로 많았고, ODA 사업도 한국 기업만이 수주할 수 있는 구속성 원조가 대부분이었다. 사업 발굴부터 시공까지 한국 기업이 맡았고 자재도 한국 것만 쓰도록 돼 있는 구조여서 해당국가에 제공한 차관은 고스란히 한국 기업의 주머니로 되돌아왔다. ODA는 재벌기업의 해외시장 진출을 위한 도구였던 셈이다. 반기문 외교장관이 유엔사무총장 선거에 나섰을 때는 각국의 표를 얻기 위해 선심성 ODA를 남발하기도 했다.

한국의 공적개발원조(ODA) 규뫼 및 GNI 대비 비율_경향DB

2009년 DAC 회원국이 되면서 한국 ODA는 양적·질적 개선을 요구받게 됐다. 하지만 정부는 원조 선진국이 됐다는 홍보에만 열을 올렸을 뿐 ODA를 국제적 수준으로 끌어올리지 못했다. 이명박 정부는 ODA를 빈곤국이 아닌 자원 보유국에 집중 투입해 ‘자원외교’의 수단으로 활용했다. 한·미동맹 강화를 위해 이라크·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이 벌인 전쟁 뒤치다꺼리에도 ODA가 투입됐다.

이명박 정부는 DAC 가입 당시 ODA 규모를 국민총소득(GNI) 대비 0.25%까지 늘리고 구속성 원조를 25% 이하로, 무상원조 비율을 90% 이상으로 바꾸겠다고 약속했다. 이 계획의 이행을 전제로 가입 심사를 통과했으니 ‘원조 선진국’ 칭호는 사실상 가불받은 것이었다. 하지만 2016년 현재까지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있다.

박근혜 정부의 ODA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최근 박 대통령의 아프리카 순방에 맞춰 내놓은 ‘코리아에이드’라는 원조 프로그램은 순방 효과를 포장하기 위해 급조한 ‘날림 공사’임이 한눈에 드러난다. 경제·사회·교육·환경이 균형적으로 통합된 지속가능한 미래를 목표로 전 세계가 고민하고 있는 마당에 의약품과 비빔밥을 싣고 다니면서 K팝 영상이나 틀어주는 게 새로운 개발협력 모델이라고 주장하니 할 말이 없다.

박근혜 정부의 ODA 정책에서 특히 심각한 것은 ‘새마을운동 세계화’다. 군사독재정부가 주도한 강제동원형 의식개조 운동이 SDGs의 취지와 부합할 리도, 실행 가능할 리도 없다. 하지만 정부는 모든 빈곤국 농촌지원사업에 새마을운동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사업 내용을 살펴보면 새마을운동과 아무 관련이 없다. 타당성 조사를 거쳐 해당국가의 형편에 맞도록 설계한 평범한 농촌개발 사업이다. 결국 새마을운동의 부정적 이미지를 세탁해 미화·홍보하는 작업에 불과하다.

우리는 지금 ODA가 해외시장 개척과 대외정책의 수단으로 활용되는 단계를 넘어 대통령 개인과 가문의 치적을 포장하는 데 이용되는 ‘ODA 사유화’ 현상을 목도하고 있다. 이게 원조선진국을 자처하는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WRITTEN BY
KHross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이 없습니다.
secret

요웨리 무세베니 우간다 대통령은 1986년 쿠데타로 집권해 32년째 대통령을 하고 있다. 철권통치자인 그를 국제사회에서 좋게 볼 리 없다. 지난 12일 5선 취임식에서는 그의 국제형사재판소(ICC) 비난 발언에 항의해 미국과 유럽 특사들이 중도 퇴장하기도 했다. 이달 말 아프리카 3개국 순방에 나서는 박근혜 대통령이 바로 이 무세베니와 정상회담을 할 예정이다. 그가 국제사회가 기피하는 독재자를 굳이 만나려는 속내는 ‘새마을운동’을 가장 성공적으로 해외에 전파한 대표적 사례로 꼽는 나라가 우간다이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자신이 한국형 개발원조(ODA) 모델로 적극 키우고 있는 새마을운동의 우수성을 홍보하고 부친 박정희 전 대통령 업적을 부각시키려 한다.

박 대통령은 새마을운동이라는 단어만 들어가면 예산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지난해 9월 유엔개발정상회의에서는 새마을운동을 빈곤퇴치와 세계발전 패러다임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새마을운동은 농촌운동이기에 앞서 유신독재를 유지하기 위한 농촌 장악 수단이었다. 관(官) 주도의 강압적 국민동원형 의식개조 운동이자 전시행정의 표본으로 꼽힌다. 강력한 충격으로 단기간에 농촌을 변화시켰지만 지속가능하지 않은 정책이었다. 1970년대 급격한 이농(離農)·농촌 황폐화 현상이 이를 단적으로 입증한다. 살벌한 시절임에도 ‘함평 고구마 사건’과 같은 농민저항운동이 일어난 것만 봐도 새마을운동이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다.

박근혜 대톨영과 무세베니 우간다 대통령이 29일 청와대에서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_강창광 기자

물론 우간다에서 통일벼가 아닌 일반미를 심었다고 면사무소 직원이 장화발로 논바닥을 뭉개거나, 갈퀴로 초가지붕을 강제로 뜯어내고 슬레이트를 얹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지금 빈곤국 새마을사업은 현대화된 농촌사업이다. 다만 그 이름을 새마을이라고 붙였을 뿐이다. 모든 ODA 사업에 ‘새마을’ 딱지를 붙여 새마을운동의 부정적 이미지를 지우고 ‘박정희 브랜드’의 성공적인 농촌개발운동으로 포장한다.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같은 맥락의 ‘박정희 우상화’ 작업이다.

박 대통령의 아프리카 순방으로 새마을운동이 다시 화제가 되는 것은 나쁘지 않다. 역사바로잡기 차원에서 새마을운동에 대한 재평가의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WRITTEN BY
KHross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이 없습니다.
secret

김정은 정권 출범 이후 북한이 지향하고 있는 ‘핵·경제 병진노선’은 이제 북한의 국가 브랜드가 됐다. 외국 언론들도 별다른 용어 설명 없이 ‘병진(Byungjin)’이라고 표기할 정도로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고유명사다. 지난 6~9일 북한이 36년 만에 처음으로 개최한 제7차 조선노동당대회는 핵·경제 병진노선이 북한의 ‘국시(國是)’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주는 행사였다.

병진노선은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처음 제시한 개념은 아니다. 병진노선은 김 위원장이 통치 스타일을 벤치마킹하고 있는 조부 김일성 주석 시절의 정책이었다. 북한은 1962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한 손에는 총을, 다른 한 손에는 낫과 망치를”이라는 구호와 함께 ‘경제건설과 국방건설 병진노선’을 제시했다.

북한이 1980년대까지 성공적인 공업국가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군수산업과 중화학공업을 연계시킨 이 같은 병진 정책노선에 힘입은 것이었다.

북한이 병진노선을 다시 들고나온 것은 김정은 정권 출범 1년 뒤인 2013년 3월 역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통해서였다. 당시 북한은 전쟁 억지력을 포기했다가 침략을 초래한 발칸반도와 중동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경제와 핵무력 건설의 병진은 조성된 정세와 혁명발전의 합법칙적 요구에 맞는 새로운 전략적 노선”이라고 소개했다.

북한은 병진노선 성공을 통해 과거 중국이 1970년대 ‘양탄일성(兩彈一星, 원자폭탄·수소폭탄·인공위성의 성공을 의미하는 말)’ 국가가 된 직후 미국과 대화를 시작해 국교수립까지 이어진 전례를 재현하고 싶어하는지도 모른다. 또 김일성 주석 시절 병진노선의 성공적 이행을 염두에 두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고 국제적 환경이 달라진 지금 과거와 같은 방식이 통하기는 어렵다.

핵없는사회를위한공동행동 소속 회원들이 26일 서울 광화문 원자력안전위원회 앞에서 열린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 30주년 기자회견에서 핵발전의 위험성과 탈핵을 주장하는 손피켓을 들고 있다._정지윤기자

병진노선의 성공은 북한이 핵보유국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 핵개발로 인해 강력한 국제적 제재를 받고 있는 북한이 대외무역을 늘리고 외자를 유치할 수는 없다. 따라서 핵과 경제성장을 동시에 이루는 것은 각국의 독자제재, 유엔결의를 통한 각종 제재가 모두 해제돼야 한다. 이는 곧 국제사회가 북한 핵을 용인하고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같은 상황은 상상하기 어렵다. 북한은 인도나 파키스탄의 경우를 염두에 두고 있는지 모르지만 애초부터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 밖에 있었던 인도·파키스탄과 NPT에 가입했다가 탈퇴해 핵개발을 한 북한은 출발부터가 다르다. 북한은 이번 당대회에서 자신들이 핵보유국임을 강조하면서 “책임 있는 핵보유국으로서 핵전파방지의무를 성실히 이행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핵확산을 하지 않을 테니 핵보유국 지위를 예외적으로 인정해달라는 뜻이다.

하지만 북한이 아니라 그 어느 나라도 예외를 인정받을 수는 없다. 지금은 과거와 달리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으면서 하지 않고 있는 나라가 수십개국에 달한다. 핵비확산의 비중이 그 어느 때보다도 높다.

만일 국제사회가 북한 핵문제를 용인한다면 다른 나라의 핵무장도 막을 수 없다. NPT 체제가 무너지고 세계는 핵무장국으로 가득 차게 된다. 북핵 문제는 북한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공멸이라는 위험한 폭탄으로 이어지는 도화선이다. 국제적 시각으로 보면 북한이 핵물질을 생산하고 핵실험을 통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것 자체가 이미 심각한 핵확산 행위이기 때문에 “핵전파방지의무를 성실히 이행하겠다”는 북한의 주장은 성립되지 않는다.

북한은 이번 당대회에서 병진노선을 일시적 대응책이 아닌 항구적 전략노선으로 규정하고 당 규약에도 자신들이 핵보유국임을 명시했다. 앞으로 북한에서 비핵화를 언급하는 것은 반당분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핵문제에 대한 퇴로를 스스로 차단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북한이 병진노선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단하는 것도 옳은 태도는 아니다. 헌법과 당 규약에 핵보유국을 명시했다고 해서 핵포기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최고지도자가 마음만 먹으면 하루아침에도 바뀔 수 있는 ‘1인 영도체제’이기 때문이다.

병진노선에 국가의 명운을 건 북한의 무모한 시도는 실패가 자명해질 때까지 이어질 것이다. 그 기간에 가장 고통받는 것은 북한의 무고한 국민들이다. 국제사회는 북한이 병진노선을 포기할 수 있도록 압박과 설득을 병행하는 작업을 멈춰서는 안된다. 또한 북한이 핵을 포기할 수 있는 안보환경을 조성하는 일에도 눈을 돌려야 한다.


유신모 | 외교전문기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WRITTEN BY
KHross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이 없습니다.
secret
최근 파리 기후변화협정 서명식을 위해 뉴욕의 유엔본부를 방문했던 리수용 북한 외무상의 동선은 독특했다. 리 외무상은 평양에서 고려항공을 이용해 중국 베이징에 도착한 뒤 아랍에미리트연합 두바이로 날아가 뉴욕행 에미리트항공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뉴욕에 도착했다. 돌아갈 때도 같은 코스를 되짚었다.

과거 북한 관리들은 미국을 방문할 때 베이징에서 태평양을 건너는 직항로를 택했다. 이번에 리 외무상이 이처럼 복잡한 경로로 뉴욕을 오간 것은 미국이나 중국 항공기를 타지 않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과 핵전쟁을 벌이겠다고 호언하는 북한 외교장관으로서 미국 국적기를 탈 수 없는 사정은 이해가 간다. 하지만 중국 국적기도 굳이 타지 않으려는 그의 행보에서는 현재의 북·중관계가 어떤 상태인지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1949년 북·중 수교 당시 북한과 중국의 군 간부들은 ‘전우애’를 지닌 사이였다. 냉전시대를 거치는 동안 북한과 중국은 혈맹의 우방이자 ‘순망치한(脣亡齒寒·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뜻)’의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냉전 종식으로 북·중 혈맹관계는 존립 근거를 잃었다. ‘중·조(북한)우호협력 및 상호원조조약’은 아직 유지되고 있지만 이 조약에 포함돼 있는 ‘유사시 자동 군사개입’ 조항은 사문화된 지 오래다.

세월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면서 북·중 지도부 간의 유대는 약해지고 혈맹의 의미는 퇴색하고 있다. 특히 시진핑(習近平)·김정은 시대의 북·중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 덤덤하다. 추궈홍(邱國洪) 주한 중국대사는 지난해 “(북·중관계를) 정상적 국가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중국 정부의 목표”라고 공공연히 밝혔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원국 대표들이 대북 제재 결의안에 대해 찬성의견을 표시하고 있다._연합뉴스

중국은 북한과 외교적 경로를 통해 의견을 주고받는 관계가 되기를 원한다. ‘당 대 당’의 채널을 통해 은밀히 소통하거나 북한 지도자가 중국을 방문해 정상회담을 마치고 돌아갈 때까지 모르쇠로 일관하면서 북한의 편의를 봐주는 일은 앞으로 점차 사라질 것이다. 최근 중국의 북한식당에서 종업원들이 집단탈출해 한국으로 왔을 때 중국 외교부가 “이들은 유효한 신분증을 소지하고 합법적으로 출국했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것은 북한을 여타 국가와 똑같이 대우하겠다는 중국 정부의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중국은 북한의 4차 핵실험 이후 고강도 대북제재안을 담은 유엔안보리 결의 2270호에 동의하고 전면적인 이행을 천명했으며 실제로 착실하게 이행하고 있다. 이 역시 중국이 북한을 정상적인 국가의 관계로 취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현재 북·중관계가 위기에 봉착한 것처럼 비치는 이유는 새로운 관계 설정을 원하는 중국과 전통적 관계를 기대하는 북한의 입장이 충돌하는 단계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변화를 목도하면서 국내 일각에서는 중국이 남북 문제에서 한국을 지지할 것이라는 기대가 고개를 들고 있다. 하지만 북·중이 정상국가 관계가 된다고 해서 중국이 북한을 버리고 한국과 손을 잡거나 남북 문제에서 한국의 입장을 지지하지는 않는다. ‘북·중 정상국가 관계론’은 북·중관계가 달라졌다는 데 방점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북·중관계가 정상국가의 관계로 변해가고 있는데 한·미, 미·일 관계는 여전히 시대에 뒤떨어진 군사동맹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중국 외교부가 이례적으로 “한·미 군사동맹은 냉전시대의 유물”이라고 공개 비난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북핵 6자회담에서 양자 간 군사동맹에 의존해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는 동북아시아 안보질서를 해체하고 집단안보체제로 바꾸자고 약속해놓고 왜 거꾸로 가느냐는 질책이었다.

중국이 최근 ‘비핵화·평화협정 동시 논의 추진’을 제안한 것도 면밀히 살필 필요가 있다. 오랜 시간이 걸리는 평화협정 논의를 시작해 한반도 문제를 현재 상황에 묶어두려는 것이 진짜 의도일 수 있다. 또한 중국이 말하는 한반도 평화체제는 통일로 가는 단계로서의 평화체제가 아니라 분단을 영구화하려는 현상 유지책일 가능성이 있다.

중국이 북한과의 관계를 재설정한다고 해도 북한의 전략적 가치가 사라지거나 중국이 생각하는 한반도 문제 해법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중국이 한반도 문제에 대한 자신들만의 원칙과 시각을 갖고 있음을 감안하지 않고 ‘어려울 때 손을 잡아주는 것이 최상의 파트너’라는 식으로 중국을 이해하려는 것은 지나치게 도식적이고 단순한 인식이다. 북·중관계는 북·중관계이고, 한·중관계는 한·중관계일 뿐이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WRITTEN BY
KHross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이 없습니다.
secret

국가 간 외교관계를 나타내는 용어는 매우 다양하다. 단순히 국교를 맺은 사이는 우호·협력국 정도이다. 사인(私人) 간의 관계로 치면 ‘아는 사이’쯤 된다. 거기서 약간 더 나아가면 동반자 관계라는 표현을 쓴다. 친구 사이라는 의미다. ‘전략적’이라는 수식어가 들어가면 특정 사안에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사이다. 지금 한·중, 한·러 관계를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라고 표현하는 것은 양자관계를 넘어 글로벌 현안까지 협력한다는 의미다. 이 정도면 국제관계에서는 최상의 표현이다. 그런데 이를 뛰어넘는 미사여구가 있다. 한·미, 한·일 관계를 지칭할 때 쓰는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라는 말이다. 민주주의·시장경제·인권·법치 등의 가치를 공유한다는 뜻이다. 미국과는 안보·경제동맹을 넘어 가치동맹을 추구한다는 취지로 사용한다.

일본이 다음주 공개할 예정인 ‘외교청서’에서 올해에도 한국에 대해 “기본적 가치를 공유하는 이웃국가”라는 표현을 뺐다고 한다. 대신 한국을 “전략적 이익을 공유한 가장 중요한 이웃국가”라고 서술했다는 것이다. 양국관계가 조금 나빠졌다고 해서 한국과 더 이상 가치를 공유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일본의 경박함이 눈에 거슬리기는 하지만 화낼 일은 아니다.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라는 말이 본래 취지와 다르게 남용된 지 이미 오래됐기 때문이다. 요새 이 표현은 한·미·일 공조를 강화해 중국을 견제하려는 의도를 포장하는 말로 쓰인다. 민주주의·법치·인권에 약점이 있는 중국과 선을 그음으로써 아시아에서 중국의 팽창을 견제하려는 미·일동맹의 틀 안으로 한국을 끌어들인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말로 변질된 것이다. 지난달 말 워싱턴 핵안보정상회의를 계기로 한·미·일 3국 정상회의를 열어 북핵·남중국해 문제 등에 대해 중국을 압박하는 모양새를 만들어 놓고 “3국은 가치와 비전을 공유하는 나라”라고 설명한 것이 단적인 예다.

동반자든, 전략적 관계든, 가치동맹이든 아무리 화려한 외교적 수사를 동원해도 국제관계에서 각국이 추구하는 궁극적 가치는 결국 ‘힘’과 ‘자국의 이익’일 뿐이다. 미·일과 가치를 공유한다는 것이 득이 되지도 않는다면 더 이상 집착할 이유도 없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WRITTEN BY
KHross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이 없습니다.
secret

북한의 4차 핵실험·장거리 로켓 발사로 가장 곤란한 상황에 빠진 나라는 중국이었다. 중국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강력한 대북 제재 결의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던 배경이기도 하다. 하지만 중국은 안보리 결의 채택 이후 국면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다. 사실 중국은 잃은 것이 없다. 대북 제재의 실효성 여부는 중국이 하기에 달려있다. 역대 최강의 제재라는 커다란 채찍을 중국의 손에 쥐여줌으로써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키워준 셈이다. 중국은 안보리 결의 이행을 명분으로 북·중관계 훼손을 최소화하면서 북한을 제재할 수 있다. 또 제재의 ‘완급 조절’을 통해 북한을 통제하고 미국도 움직일 수 있다.

정권 교체기를 맞고 있는 미국은 앞으로 최소 1년 동안은 정책적 변화를 주거나 북한 문제에 매달릴 수 없다. 미국이 중국에 운전석을 내준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이 대책없이 중국에 주도권을 넘긴 것은 아니다. 미국은 중국의 일방적 독주를 막기 위한 카드를 갖고 있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의 한반도 배치, 중국이 직접 대상이 될 수 있는 ‘세컨더리보이콧’ 실행 등이 그것이다. 북한 문제는 이처럼 미·중의 전략적 이해관계의 틀 속에서 다뤄지고 있다. 미국이 적어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중국이 요구하는 ‘신형대국관계’를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은 지난 8일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중국은 안보리 결의를 전면적이고 완전하게 이행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중국은 안보리 결의에 제재 방안뿐 아니라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내용이 명시돼 있음을 강조한다. 따라서 중국의 ‘전면적이고 완전한 결의 이행’은 제재 강화와 함께 대화 재개를 위한 노력에도 적극 나서겠다는 의미다. 왕 부장이 북·중관계를 ‘정상적 국가 관계’라고 언급한 것도 한·미를 겨냥한 발언이다. 중국은 북한과 더 이상 ‘혈맹의 특수관계’를 유지하지 않고 있는데 한·미는 여전히 군사동맹 강화에 매달리는 냉전시대적 태도를 고집하면서 한반도 평화·안정·비핵화를 위한 노력에 역행하고 있다는 중국의 관점을 드러낸 것이다.

왕이 중국 외교부장이 8일 베이징 미디어센터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한반도 정세와 대북 제재안에 관한 입장을 말하고 있다._AP연합뉴스

아무리 혹독한 제재를 가한다고 해도 결국 최종적으로 문제를 푸는 것은 외교적 협상이다. 중국은 이제 자신들의 방식으로 한반도 문제를 풀기 위해 강력히 움직일 것이다. 중국은 이미 ‘비핵화와 평화협정 논의의 병행추진’이라는 실행 방안까지 마련해두고 있다. 한·미는 비핵화가 평화협정보다 우선이라는 공식적인 입장을 유지하고 있지만 앞으로 어떤 식으로 논의가 진행되더라도 평화협정 문제를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다. 그동안 한국을 포함한 당사국들이 북핵 문제에 몰두하지 않은 탓에 이제는 북핵만을 떼어서 따로 논의할 수 있는 단계는 지나버렸다. 앞으로 비핵화는 동북아와 한반도의 안보구조를 바꾸는 과정에서 하나의 구성요소로 다뤄지게 될 것이다. 그만큼 비핵화의 길은 험난해졌다.

평화협정은 60년 이상 지속돼온 한반도의 냉전구도를 해체하는 작업이다. 시작과 과정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마지막 단계는 비핵화, 북·미관계 정상화, 평화협정 체결이 동시에 이뤄지는 형태가 될 수밖에 없다. 전인미답의 길이며 정치·군사·경제·민족 등 중층적 요소를 동시에 다뤄나가야 하는 외교의 ‘종합예술’이다. 수순이 틀리거나 한 발만 잘못 내디뎌도 민족의 운명이 뒤바뀔 수 있는 위험천만한 길이기도 하다. 평화협정이 체결된다고 해도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평화체제가 구축되는 것은 아니다. 평화체제는 남북관계와 주변 강대국의 정치·군사적 이해관계가 상호작용을 하면서 국제적·제도적으로 평화 상태를 보장받을 수 있어야 가능해진다. 특히 한국은 ‘분단을 영구화하는 평화체제’가 아니라 ‘통일을 지향하는 평화체제’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주변 강대국과도 입장이 다르다.

정부가 과연 이 같은 고도의 외교적 과제를 감당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드러난 박근혜 정부의 외교적 역량으로는 가능하지 않아 보인다. 이 정부는 지난 3년간 남북관계를 더 이상 손댈 수 없을 정도로 악화시켰고 미·중 균형외교에도 실패했다. 북한 핵실험 대응 과정에서 중국·러시아에 대한 외교적 자산을 모두 탕진했고 대일 외교에도 철저히 실패했으며 굴욕적 한·일 위안부 문제 합의로 국격을 땅에 떨어뜨렸다. 손대는 외교 사안마다 ‘불가역적으로’ 망가뜨린 탓에 다음 정부는 이를 수습하는 데만도 벅찰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유지의 유일한 수단으로 남은 평화협정 문제까지 다루게 되는 것은 위험하다. 제발 이 문제만은 손대지 말고 다음 정부에 넘겼으면 한다. 천하의 이순신 장군이 다시 나타난다고 해도 배 12척은 남겨줘야 나라를 구할 수 있다.


유신모 | 외교전문기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WRITTEN BY
KHross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이 없습니다.
secret

지난해 12월28일 한·일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에 합의한 직후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박근혜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법적 책임은 1965년 한일협정으로 이미 끝난 문제”라고 재확인했다. 의회에서는 위안부 문제는 국가 범죄가 아니라고 부인했고 유엔에 제출한 문서에는 위안부 강제연행 증거가 없다고 명시했다. 합의 이후에도 달라진 것은 없다. 그런데도 정부는 위안부 문제가 ‘최종적·불가역적으로’ 해결됐다고 스스로 종지부를 찍고 이것에 발목이 잡혀 할 말도 제대로 못한 채 일본의 눈치를 보고 있다. 반인도주의적 전쟁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에게 피해자가 이런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대체 뭐가 뭔지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다.

어떻게 이런 합의가 나올 수 있었는지 파악하려면 박근혜 정부 들어 한·일 관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되짚어봐야 한다. 위안부 문제는 한·일 관계의 모든 것을 좌우하는 주제가 아니었다. 중요하고, 고통스럽고, 풀기 어려운 문제이긴 했지만 이 문제 때문에 한·일 관계가 중단될 위기에 처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박 대통령은 취임 초기부터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한·일 정상회담도 없다는 초강경 대일외교 기조를 들고 나와 한·일 관계의 입구를 거대한 바위로 막아버렸다. 위안부 피해자들과 국민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일본 총리를 만나지 말라’고 요구한 것도 아니다. 박 대통령 스스로 위안부 문제를 한·일 관계의 최대 걸림돌로 만들어 버렸다.


2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모두발언을 하고있다._청와대사진기자단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일 전력 논란을 차단하기 위해 일부러 일본에 강한 모습을 보이려 했거나, 국민감정에 영합하는 대일 강경책으로 국내정치적 효과를 기대했을 수 있다. 하지만 한·일 관계의 최대 난제인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외교의 전제 조건으로 내걸고, 미국의 아시아 재균형정책으로 동북아 정세가 요동치는 상황에서 초강경 대일 자세를 취한 것은 외교적 입지를 스스로 좁힌 심각한 자충수였다.

한·일 관계 경색이 지속됨으로써 생기는 외교적 부담은 날로 커져갔다. 특히 한·미·일 협력을 기본으로 하는 미국의 아시아정책이 펼쳐지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의 대일 강경외교는 애초부터 오래 버틸 수 없는 구조였다. 결국 박 대통령은 위안부 문제의 덫에서 빠져나갈 탈출구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2014년 3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헤이그에서 박 대통령과 아베 총리를 한자리에 앉혀 한·미·일 정상회담을 마련한 이후 이 같은 움직임은 본격화됐다. 박 대통령은 이때 대일 외교의 첫 단추를 잘못 끼웠음을 인정하고 위안부 문제 해결을 장기적 과제로 돌린 뒤 일본과 정상적인 외교를 시작했어야 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어떤 식으로든 자신이 저질러놓은 위안부 문제를 해결해 정치적 곤경에서 빠져나오려 했다.

박 대통령의 대일 태도는 돌변했다. 지난해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 기념식에서 “과거사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자”는 메시지를 내놓았다. 또 역사수정주의적 시각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아베 담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결국 국교정상화 50주년인 2015년이 지나가기 사흘 전에 위안부 문제 합의가 발표됐다. 전쟁범죄 가해국과 피해국의 합의라고는 볼 수 없는 굴욕적인 합의에 국민적 비판이 터져나온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이 합의를 역대 어느 정부도 하지 못했던 일이라고 자화자찬했다. 국민적 비판에 대해서는 “정치공격의 빌미로 삼고 있다”고 호통을 쳤다. 그리곤 이 합의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절규하는 피해자들에게 ‘이게 최상의 결과이니 이제 남은 여생을 편하게 사시라’고 한다.

이 합의는 자신이 파놓은 함정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박 대통령이 결국 위안부 피해자들을 밟고 그 함정에서 빠져나온 만행이다. 또 위안부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라 위안부 문제의 진실을 추후에도 규명하지 못하도록 땅속에 파묻어버린 행위다. 이 합의를 무효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지만, 지금까지 박 대통령이 보여준 모습을 감안하면 그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어처구니없는 합의는 유지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정부가 바뀌면 뒤집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에 따른 엄청난 부담은 국민과 국가의 몫이 될 것이다. 국민들이야 대통령 잘못 뽑은 죄로감수해야 하겠지만 위안부 피해자들은 대체 무슨 죄인가. 지금이 아니라도 좋으니 박 대통령은 피해자들이 전부 돌아가시기 전에 진심으로 사과해야 한다. 그것이 이 굴욕적 합의에 대한 죄를 조금이라도 덜어내는 길이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WRITTEN BY
KHross

받은 트랙백이 없고 , 댓글이 없습니다.
secr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