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마스쿠스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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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마스쿠스의 봄’

by 경향글로벌칼럼 2017. 4. 13.

“알레포에서 아이들이 죽어가는데 잠을 이룰 수 있는가.” 온 국제사회의 지탄을 받고 있는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51)은 지난해 11월6일 영국 더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기자가 이런 질문을 하자 웃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규칙적으로 자고 일하고 잘 먹고 운동도 한다.” 시리아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어떻게 느끼느냐고 묻자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테러리스트들의 잘못이다. 우리는 지금 자선이 아니라 전쟁을 얘기하고 있다.”

한때 아랍의 새로운 리더로 기대를 받았던 의학도는 ‘괴물’이 돼 있었다. 34살에 아버지 하페즈의 ‘30년 철권통치’를 이어받은 아사드는 당초 정치에 뜻이 없었다. 후계자는 카리스마 넘치던 장남 바셀이었다. 둘째 아사드는 1988년 다마스쿠스 의대를 졸업하고 시리아군에서 의사로 일하다 영국 런던으로 건너가 안과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속도광’ 바셀이 1994년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운명이 바뀌었다.

 

하페즈는 그를 시리아로 불러들였다. 새 후계자를 위한 권력승계가 시작됐다. 아사드는 군에 들어가 권력 기반을 다지고 제2 권력자로 반부패 사정을 주도해 정적들을 제거했다. 2000년 하페즈가 사망하자 그해 7월 치러진 대선에서 아사드는 유일한 후보였다. 군, 정보기관, 집권 바트당을 장악한 아사드 세력은 헌법을 고쳐 대통령이 될 수 있는 나이를 40살에서 34살로 낮췄다. 지지율은 99.7%였다.

 

아사드는 취임하면서 개혁, 경제 근대화, 우리만의 민주화 실험을 공언했다. ‘다마스쿠스의 봄’이 왔다. 그는 2000년 11월 인권탄압과 고문으로 악명 높던 메제흐 교도소를 폐쇄하고 아버지 치하에서 투옥된 정치범 수백명을 풀어줬다. 30여년 만에 처음으로 독립언론이 문을 열고 지식인들이 목소리를 내는 장이 허용됐다.

 

그러나 봄은 덧없이 짧았다. 해가 바뀌자 수백명이 다시 잡혀가고 언로는 막혔다. 서방 교육을 받은 젊은 지도자는 왜 돌변한 것일까. 시리아를 반세기 동안 지배한 아사드가(家)는 수니파가 다수인 시리아에서 10% 남짓 되는 소수인 시아파 분파 알라위파다. 시리아 정치는 1946년 독립 후 민주주의가 3년 만에 무너지고 이후 쿠데타가 거듭되며 줄곧 군이 좌우해왔다. 알라위파의 핵심 권력 기반도 군이었다. 아버지의 측근들과 아사드가문이 주축인 친위대 ‘공화국수비대’는 개혁에 세게 저항했다. 소수 권력집단의 강렬한 생존본능과 불안에 아사드는 쉽게 굴복해버렸다. 아사드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과 부를 새 엘리트들에게 몰아주는 데만 관심이 있었을 뿐 정치개혁은 당초 그의 리스트에 있지 않았다는 분석도 있다. 아사드는 2007년에도 유일한 대선 후보로 99.8%의 지지를 받아 임기를 7년 더 연장했다.

 

미완의 ‘다마스쿠스의 봄’은 10년 뒤 다시 왔다. 2011년 ‘아랍의 봄’이었다. 오랫동안 억눌린 분노와 절망이 터져나왔다. 시민들은 1963년부터 ‘숙적’ 이스라엘의 전쟁 위협을 빌미로 온 나라를 짓눌러 온 ‘비상사태’를 해제하라며 정치개혁을 요구했다. 아사드는 거대한 분노에 못 이겨 비상사태는 해제했지만 시위에 무자비한 탄압으로 맞섰다.

 

내전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6년이 흘렀다. 아사드를 멈춰 세울 기회는 시리아 정부군, 반군, 이슬람국가(IS), 미국, 러시아가 뒤얽히면서 멀어져 버렸다. 그 사이 32만여명이 목숨을 잃고 490만명이 시리아를 떠났고 630만명이 집을 잃었다. 아일란 쿠르디는 터키 해변에서 익사했고 오므란 다크니시는 건물에 깔려 피를 흘렸고 쌍둥이 아기는 화학무기에 싸늘한 주검이 됐다. 괴물이 된 지도자와 국제사회의 복잡한 게임 속에서 참혹한 희생을 치른 시리아인들의 바람은 이젠 너무도 소박할지 모른다. 그저 총성과 공습이 멈추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 ‘다마스쿠스의 봄’은 아직도 멀었나.

 

국제부 이인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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