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칼 실명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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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박은경의 특파원 칼럼

‘식칼 실명제’

by 경향글로벌칼럼 2016. 9. 28.

베이징의 웬만한 슈퍼마켓에서는 식칼을 팔지 않는다. 식칼을 판매하는 일부 대형 마트에서도 비닐로 몇 겹씩 포장해 두고 함부로 꺼낼 수 없게 진열한다.

 

베이징에서 식칼은 아무 데서나 팔 수도, 아무나 살 수도 없는 금지품목이다. 시 당국이 범죄 도구로 사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2012년부터 식칼 실명제를 실시해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식칼을 사려면 신분증을 제시해야 하고, 신분증이 있어도 정신이상자나 미성년자는 구매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광저우시도 2010년부터 식칼 실명제를 시행하고 있다.

 

흔히들 가짜가 판치는 중국이라고 생각하지만 ‘진짜 이름’이 없으면 못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한국에서는 ‘자금성(紫禁城)’이라는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는 고궁(古宮)에 입장할 때도 신분증이 필요하다. 경로우대 같은 할인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입장권을 사기 위해 필요하다. 외국인도 여권을 제시하지 않으면 표를 살 수 없다.

 

신분증이 없으면 기차도 탈 수 없다. 각각 신분증을 확인하기 때문에 가족이나 친구 대신 기차표를 사기도 쉽지 않다. 기차표에는 행선지와 출발일시뿐 아니라 구매자의 이름과 신분증 번호까지 인쇄돼있다. 표면적으로, 중국은 완벽한 실명제 사회다. 휴대전화, 자전거, 백화점 선불카드, 맞선사이트, 택배서비스, 절삭공구 구입, 피임약 구매 등 다양한 영역에 이미 실명제를 도입했다. 그러나 그만큼 유명무실한 실명제도 많다. 중국은 2007년 말부터 공장에서 생산된 자전거에 고유번호를 부여하고, 구입하는 고객은 신분증을 제시하는 자전거 실명제를 실시했다. 자전거를 분실했을 때 주인을 쉽게 찾아줄 수 있고, 장기간 방치된 자전거를 효율적으로 처리하겠다는 목적에서였다. 그러나 일부 소기업은 자사 생산 자전거에 아예 고유번호를 만들지 않았고, 매출 감소를 우려한 판매점에서 등록을 하지 않고 자전거를 팔면서 이 제도는 유명무실해졌다.

 

범죄자를 효과적으로 감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2010년 도입된 휴대전화 실명제도 완전히 뿌리 내리지 못했다. 휴대전화 사용에 필요한 유심칩을 사려면 신분증을 제시하게 돼 있지만 통신회사의 정식 매장이 아닌 신문가판대나 노점상에서는 실명 등록 없이도 구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비실명 휴대전화 이용자 수도 1억300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전화금융사기(보이스피싱)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피해자가 사망하거나 자살하는 사건이 잇따르자 중국 당국은 실명제 강화를 꺼내들었다. 중국 당국은 전화 실명 등록률을 10월 말까지 96%로 올리고 연말까지 100%를 달성하는 한편 실명 등기를 하지 않는 전화는 사용 중지키로 했다. 당장 베이징에서는 다음달 15일부터 실명 등록을 하지 않는 휴대전화 사용을 제한한다. 보이스피싱의 원인 중 하나로 꼽히는 대포폰(타인 명의로 개통한 휴대전화) 사용을 뿌리 뽑기 위해 휴대전화 실명제에 매달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실명제는 범죄 예방의 만병통치약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보이스피싱은 실명제만으로는 뿌리 뽑기 힘들다. 해외에서 걸려오는 전화나 해외 번호로 전송되는 문자메시지는 자국 내 실명제만으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가짜 서버를 통한 피싱은 여전히 근절되지 못했다.

 

올 초 인터넷 방송이 선정성, 폭력성 등이 문제가 되자 중국은 인터넷 방송 진행자 실명제를 도입했다. 그러나 수익 창출에 혈안이 된 인터넷 방송 플랫폼들의 참여 부족 등으로 당초 목적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슈퍼마켓에서 왜 식칼을 팔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당국이 허가해주지 않아서라며 근처 시장 철물점을 알려줬다. 베이징의 일부 철물점에서는 여전히 신분증을 확인하지 않고 식칼을 팔고 있다.

 

베이징 | 박은경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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