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재균형’에서 멀어지는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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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유신모의 외교 포커스

‘아시아 재균형’에서 멀어지는 미국

by 경향글로벌칼럼 2015. 12. 7.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2011년 11월 호주 의회에서 ‘아시아 회귀(Pivot to Asia)’를 선언한 지 4년이 지났다. 이 정책은 미국 국내정치의 혼란으로 인한 몇 번의 개념적 조정을 거쳐 ‘아시아 재균형(Rebalancing)’이라는 이름으로 오바마 2기 행정부 대외정책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수전 라이스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2013년 11월 조지타운 대학 강연에서 정리한 이 정책의 핵심적 내용은 유럽과 중동에 두었던 미국의 외교·군사적 중심축을 아시아로 옮겨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고 미국의 쇠퇴를 지연시킨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미 해군력의 60%를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배치하고 역내 동맹국과 우방에 안보 유지를 위한 역할을 넘겨주는 것이었다.

애초 시발점은 2008년 리먼 브러더스 파산으로 촉발된 미국의 금융위기였다. 이를 계기로 중국은 패권국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했고 냉전 종식 이후 30년 이상 유지됐던 미국 중심의 단극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미국은 이를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위기로 받아들였다. 미국은 아·태 지역에 군사력을 증강시키고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같은 수단을 동원해 중국을 견제하려 했다. 하지만 미국은 그럴 돈이 없었다. 당시 미 국무부의 한 관계자에게 “미국이 구상하는 아시아 정책의 기본 개념이 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는 “pay back(보답)”이라고 답했다. 과거 미국이 ‘돌봐주었던’ 일본과 한국에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군사·안보적 역할을 분담시키는 것으로 그간의 ‘투자금’을 ‘회수’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동북아시아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냉전의 잔재가 남아 있는 데다 역내 국가들은 19세기부터 시작된 식민주의 시대의 과거사도 청산하지 못한 사이이며 그로 인한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하게 남아 있는 매우 독특한 지역이다. 동북아가 필요로 했던 것은 조화로운 질서 창출을 위해 노력하는 안정자이지 동맹관계를 이용해 경쟁과 대립을 촉발하는 갈등 유발자가 아니었다.


뉴욕 타임스퀘어의 ABC방송 전광판에 리먼브라더스의 파산 소식 자막이 보이고 있다_AP연합뉴스


미국의 아시아 정책은 협력을 요구하면서 실제로는 갈등을 심화시키는 구조적 모순도 안고 있다. 일본을 재무장시키면서 한국에 일본과 협력하라고 한 것은 한·일 갈등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미국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라는 무거운 돌로 짓눌러 놓았던 부실한 전후관리의 문제가 튀어나올 수도 있는 위험한 짓이었다. 더욱이 일본의 집단자위권 행사와 보통국가화는 평화헌법을 무력화하고 전후질서에서 벗어나는 것이라는 점에서 일본의 극우보수가 원하는 방향이다. 미국이 이 같은 변화를 주도하면서 야스쿠니 참배나 극우세력의 역사수정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지난 4년간 아시아에서는 안보환경이 안정되지도, 민주주의적 가치가 증대되지도 않았다. 역내 군사동맹 강화와 거대 자유무역협정을 통해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시도는 가뜩이나 혼란스러운 동북아 질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미·중의 대치는 지난 4년 동안 극도로 심화됐고 수면 위로 돌출된 미국의 두 동맹국 간의 갈등은 봉합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우경화로 치닫고 있는 일본은 집권여당 내에 제2차 세계대전 A급 전범을 처벌한 극동군사재판 등의 역사적 사실을 검증하기 위한 기구를 설치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같은 동북아 상황이 미국이 원했던 그림은 아니었을 것이다. 문제는 이처럼 동북아를 휘저어 놓은 미국이 이슬람국가(IS) 출현과 미·러 갈등 등으로 더 이상 아시아에 집중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몰리고 있으며, 이 계획을 추진했던 오바마 행정부의 임기는 끝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가장 큰 피해를 보는 나라는 한국이다. 애초부터 박근혜 정부의 최대 외교과제는 미·중의 각축 속에서 생존전략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국은 미·중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전전긍긍하는 존재로 국제사회에 각인되어 가고 있다. 박근혜 정부는 ‘동북아평화협력구상’에서 경제적 상호 의존도가 높아지는데도 정치·안보 면에서 갈등이 깊어지는 이른바 ‘아시아 패러독스’를 해소할 것을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자신들도 이를 실천하지 않았다. 한·중 무역규모가 전체의 25%를 넘어설 정도로 중국에 경제를 의존하고 있는 한국이 한·미·일 안보협력을 지향하는 것 자체가 아시아 패러독스를 심화시키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박근혜 정부가 이 상황을 잘 관리할 수 있을까. 하지만 박근혜 정부의 임기도 이미 반환점을 돌았다. 기존의 정책을 튜닝하는 정도는 가능하지만 새로운 정책을 추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의미다. 남은 기간에 뭔가 해주기를 기대해야 할지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기를 기다리는 것이 현명한 것인지 판단이 잘 서질 않는다.


유신모 | 외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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