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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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더글러스 러미스 칼럼

“전쟁은 평화”

by 경향글로벌칼럼 2013. 11. 25.

나는 이번 학기에 오키나와 국제대학교에서 국제관계학 강의를 하고 있다. 여러 텍스트 중 학생들에게 읽히는 것은 조지 오웰이 1949년에 쓴 소설 <1984>다. 이것은 E M 포스터의 단편 <기계가 멈추다>(1909), 카렐 카펙의 희곡 <로섬의 만능로봇>(1909), 자미아틴의 <우리>(1922),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1931), 레이 브래드버리의 <화씨 451>(1953)과 더불어 20세기의 훌륭한 디스토피아 저작들 중 하나다. 각 작품은 미래를 그린 픽션으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해 어느 정도 가르쳐주는 바가 있다. 


디스토피아 픽션은 사회 분석의 한 방법이다. 저자는 어떤 흐름을 포착해 그것이 계속 이어질 경우 세상이 어떤 모습이 될 것인지 그려낸다. 포스터와 카펙에게 그것은 노동의 기계화였고, 헉슬리에게는 기술적으로 생산된 ‘행복’이었다. 브래드버리에게 그것은 전자적으로 창출된 가상현실로부터의 도피였다. 오웰에게는 그것이 안보국가였다.


오웰이 상상한 미래 속에서 세상은 세 개의 초대국으로 나뉜다. 구(舊)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한 ‘오세아니아’, 구 소련을 중심으로 한 ‘유라시아’, 그리고 구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다. 이 초대국들은 영구전쟁 상태다. 구도는 늘 두 나라가 동맹을 맺고 나머지 한 나라를 적대하는 식이다. 하지만 동맹은 변한다. 오늘의 동맹이 내일의 적이 되고, 오늘의 적이 내일의 동맹이 된다. 국민들은 국가가 하는 일이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기 때문에 동맹이 변할 때에도 모든 신문과 역사책은 새로운 동맹이 예전에도 늘 동맹이었으며, 결코 적이었던 적이 없다는 식으로 수정된다. 


[어제의 오늘] 1949년 조지 오웰 ‘1984년’ 출간 (일러스트 : 김상민)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는 이러한 기록을 고치는 일에 종사한다. 그가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동맹에 변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이해한 뒤 그러한 변화를 머릿속에서 지우고 새로운 동맹이 과거부터 계속 동맹이었다고 진심으로 믿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오웰은 이러한 마음 상태를 ‘이중사고(doublethink)’라고 표현했다. 사전에 등재돼 있지 않은 단어인데, 어떤 것을 알면서도 동시에 알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세 나라 사이의 전쟁은 정치적 차이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세 나라의 정치구조는 거의 비슷하다. 세 나라 모두 같은 슬로건을 쓴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 그러면 왜 전쟁을 하는 걸까. 


윈스턴은 시스템의 작동방식을 설명한 비밀서적에서 답을 발견한다. ‘전쟁은 순전히 국내적인 사건이란 걸 알게 될 것이다. … 전쟁은 각국의 지배집단이 그 국민들을 대상으로 수행하는 것이고, 전쟁의 목적은 영토를 정복하거나 막는 것이 아니라 지금 같은 사회구조를 유지하는 데 있다.’


영구전쟁은 나라를 영구 위기상태로 만든다. 이로써 정부는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법적인 권리를 유예하거나 폐지할 수 있다.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을 정당화할 수 있으며, 급기야 역사를 고쳐 쓸 수도 있다. 자국민들을 상대로 스파이 활동을 할 수 있고, 정부의 결정과 조치를 비밀에 부칠 수 있으며, 대중의 분노를 나라 밖으로 향하게 해 ‘적’에게만 초점을 맞출 수도 있다.


<1984>에서 국가의 이러한 경향은 결국 극단적 결말을 맞게 된다. 그 결말은 기발하고, 매혹적이며, 우울하다. 왜 우울하냐면 오늘날 전쟁과 전쟁협박에서도 똑같은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질문을 할 수밖에 없다. 미국 정부가 자국 시민을 감시하는 것은 테러와의 영구전쟁 때문인가, 아니면 자국민 감시를 위해 테러와 영구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인가. 이 질문을 내 조국에 대해 해봤지만 같은 질문을 다른 나라에도 할 수 있다. 


내가 사는 일본에서 자민당 정부는 국가에 전쟁권을 부여하고 총리에게 비상사태와 헌법권리 유예 선언 권한을 부여하기 위해 헌법을 바꾸려 한다. 그러면 비상사태는 수단이고 전쟁이 목적인가, 아니면 전쟁은 수단이고 비상사태가 목적인가.


며칠 전 한 일본 정부 관리는 헌법 9조(평화헌법 조항)에 대해 일본이 전쟁에 나가 싸울 권리를 갖고 있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해석 개헌’을 하면 헌법을 고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전쟁은 평화”인 셈이다. 이보다 더 좋은 이중사고의 예가 있을까.


더글러스 러미스 | 정치학자·오키나와 거주

<번역 | 손제민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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