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과 정육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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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박은경의 특파원 칼럼

공무원과 정육점

by 경향글로벌칼럼 2016. 10. 26.

“펜으로 쓰는 건 모두 진실일 수 없지만 칼은 한 근이면 한 근, 두 근이면 두 근, 정확한 양을 썰어내죠. 칼은 공평하고 통쾌해요.”

 

‘베이징대 출신 정육점 주인’으로 유명한 루부쉬안(陸步軒)이 12년간의 공무원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정년이 보장된 직장을 스스로 관둔 그가 돌아간 곳은 취업을 못했을 때 고육지책으로 선택한 정육점이었다. 의외의 선택을 한 루부쉬안은 한 인터뷰에서 칼을 든 직업(정육점)과 펜을 든 직업(공무원)의 차이점으로 ‘공평’과 ‘통쾌’를 꼽았다.

 

루부쉬안이 고학력 취업난을 대표하는 이름이 된 것은 2003년이다. 1985년 고향인 산시성 창안현(현 창안구)에서 대입시험 문과 수석을 차지한 그는 최고 명문인 베이징대학 중문과에 입학했다. 베이징에 남아 ‘펜’을 계속 잡고 싶었지만 1989년 톈안먼 사태 직후 대학을 졸업한 탓에 마땅한 직장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베이징대 출신 정육점 주인’으로 유명한 루부쉬안(오른쪽)이 공무원 생활을 그만둔 뒤 지난달 저장성 항저우의 슈퍼마켓에 정육점을 내고 진열대의 고기들을 살펴보고 있다. _ 차이나데일리(China Daily)

 

여러 차례 사업에 실패한 뒤 결국 1999년 고향에서 정육점을 열었다. 고객들에게 신뢰감을 주기 위해 일부러 안경까지 쓰고 일했다. 다행히 개업 3년 만에 월수입 1만위안(약 167만원)으로 웬만한 회사원 연봉을 앞섰다. 그러다 방송사에 다니는 중학 동창의 눈에 띄어 그의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졌고, ‘베이징대 백정’으로 유명해졌다. 1999년 대학 입학정원을 확대한 후 2003년부터 대졸 취업난이 심각해지기 시작한 중국에서 루부쉬안의 스토리는 심화하는 취업난의 대표적 사례였다.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지 못했다는 세간의 비판을 의식한 지방정부는 루부쉬안 스토리가 달갑지 않았다. 여러 기관에서 스카우트 제안을 쏟아냈고, 책과 펜이 좋았던 루부쉬안은 창안구의 문서국 지방기록실을 택했다. 루부쉬안이 3명뿐인 사무실에서 <창안구 연감> <창안구 역사> 등 각종 책을 쓰는 동안 동생 부부에게 맡긴 정육점은 계속 번창했다. 2007년에는 광저우에서 정육점 체인사업을 하는 베이징대 동문 대표와 인연이 닿아 정육 교육 학교를 세우는 데 참여하게 됐다. 명예교장직을 맡은 그는 교재뿐 아니라 <루부쉬안이 가르쳐주는 안심 고기 선택법> 같은 책을 냈다. 창안구 역사를 기록할 때, 아마도 어두운 부분이나 비극적 사건은 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육 교재에는 어떻게 나쁜 고기를 선별하는지, 경험하고 느낀 모든 것을 쓸 수 있었다.

 

그는 결국 올 8월 공무원을 그만두고 정육점으로 돌아갔다. 명문대를 졸업하고도 취업을 하지 못해 3D 업종을 선택한 것이 불행만은 아니었고, 기적처럼 공무원으로 특채된 것이 해피엔딩도 아니었다. 루부쉬안은 보람 있고 좋아하는 일을 찾아 스스로 해피엔딩을 써나갔다.

24일 응시 마감된 올해 중국 국가공무원시험의 경쟁률은 사상 최고 수준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고 한다. 2만7000명을 선발하는 이번 시험의 응시자 수는 130만명을 넘어섰다. 최종 응시자 수는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국가를 위해 일한다는 자부심, 정년이 보장되는 안정적 직장이란 장점 때문에 공무원은 인기 직종으로 꼽혀왔다. 올해 가장 높은 경쟁률을 기록한 직종은 민주동맹 판공청 접대처 주임으로, 1명을 뽑는데 1만명 가까운 지원자가 몰렸다고 한다. 그런데 응시자들이 몰린 이유는 별다른 자격 제한이 없고 대졸 및 2년간의 일선 업무 경험만을 요구한 데다 업무 역시 공공기관 간 공무상 응대라는 단순 일자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득수준이 낮은 서부지역의 하위직 200여개에는 응시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   

 

결국 직업에서 오는 어떤 보람이나 적성보다는 단순한 돈벌이 수단, 편안함을 더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이런 일자리에서는 어떤 행복도, 통쾌함도 얻기 힘들다. 루부쉬안이 공무원 대신 정육점을 택한 이유도 같을 것이다.

 

베이징 | 박은경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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