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플랜더스의 양귀비와 N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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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플랜더스의 양귀비와 NLL

by 경향글로벌칼럼 2012. 10. 31.

송민순 | 전 외교통상부 장관


 

제1차 세계대전의 격전지였던 플랜더스 지방은 양귀비로 유명하다. 오랜 참호전으로 초목들이 포화 속에 타들어간 곳에 오직 양귀비만이 병사들의 무덤 위에 피어올랐다. 시인들은 “플랜더스의 양귀비는 젊은 병사들의 피를 먹고 자란다”고 슬퍼했고, 학자들은 이 피가 잘못 선택된 정치인들의 어리석은 야망 때문에 흘린 것이라고 설파했다. 이 양귀비는 세계 각국 현충일의 리본이 되었다. 


흔히 정치 계절은 어리석은 계절이라고 한다. 본질적 국가 이익보다는 파당적 이익에 몰입하는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지금 동아시아를 흔들고 있는 민족주의와 영토 분쟁의 결합 뒤에는 이런 어리석은 이유들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 국내도 나라의 원대한 방향을 제시하고 당면 과제들의 대책을 토론해야 할 대선 정국이 느닷없이 서해 북방한계선(NLL) 논란에 휩싸였다.


 지난 15년간 서해는 한반도의 화약고가 되어 왔다. 젊은 장병들이 흘리지 않을 수도 있었던 피를 흘려야 했고, 앞으로 또 얼마나 더 많은 피를 흘려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역대 우리 정부는 남북간의 충돌을 방지하면서 이 경계선을 지키기 위해 군비태세 강화와 남북간 소통이라는 양면적 접근을 해왔다. 서해공동어로수역이 그 대표적 사례의 하나이다. 


공동어로수역은, 첫째, NLL을 기선으로 하여 양측이 같은 면적의 수역을 내놓는 개념이므로 NLL이 남북간의 해상 경계선임을 재확인하는 의미가 있고, 둘째, 남북 대치를 틈타 중국 어선이 채가던 고기를 남북 어선이 함께 잡을 수 있으며, 셋째, 남북 해군 초계정간 충돌 가능성을 줄이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NLL포기 규탄 결의문 채택한 새누리당 (경향신문DB)


공동어로수역 설정 방식은 앞으로 협상해야 할 과제이다. 우리로서는 한반도에서 항구적 평화 장치가 수립될 때까지는 NLL을 확고히 지키는 것이 최우선 과제이고, 북한은 우선 숨통을 좀 열어 보자는 것이 당장의 목표인 만큼 협상 여지가 없는 것이 아니다. 북한의 선전적 주장과 현실적 요구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도 새겨 둘 필요가 있다. 


그런 차원에서 박근혜 후보가 남북간 기존 해상 경계선 존중을 전제로 공동어로수역과 평화수역 설정 방안을 북한과 논의할 용의를 표명한 것은 바람직하다. 제대로 잡은 방향이 흑백논란에 휩쓸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노무현-김정일 대화록 건만 해도 그렇다. 설사 지금 일각에서 주장하는 바와 유사한 취지의 NLL 관련 대화가 있었다 하더라도 결국 효력을 갖는 것은 문서화된 합의이다. 간혹 최종 문서 합의에 이르기까지 있었던 대화를 ‘토의 기록’이라는 형식의 공동문서로 작성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2007년 정상회담의 경우, 유일한 공동문서는 ‘10·4 선언’이다.


NLL은 한반도 평화와 안보의 핵심 고리이다. 최근 북한의 NLL 침범 사례와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 등 대통령 후보들의 새로운 남북관계 공약에 비추어, 다음 정부 출범시 튼튼한 안보 위에 남북관계발전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지금 논쟁해야 할 것은 NLL의 과거가 아니라 미래이다. 


아울러 NLL의 정의에 대한 논쟁도 앞으로 통일을 이룰 때는 우리 영토를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남북의 경계선을 허무는 것이 되어야 국제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임을 염두에 둬야 한다.


피를 흘리지 않고도 나라를 지키는 것이 최상의 국가 안보이다. 지도자들이 “타협은 있을 수 없다. 죽음으로 사수해야 할 선이다”라고 외치는 것은 젊은 장병들을 담보로 정치 구호에 몰입하는 것으로 비친다. 서해가 바다의 참호전으로 끝없이 젊은 피를 삼키는 한반도의 플랜더스가 될 수는 없다. 어리석은 정치의 계절이 안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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