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창 칼럼] 지리적 인간, 라트비아 주마간산記
본문 바로가기
=====지난 칼럼=====/넓은세상 깊게 보기

[김우창 칼럼] 지리적 인간, 라트비아 주마간산記

by 경향글로벌칼럼 2011. 11. 22.
김우창 | 이화여대 석좌교수
  
지난달 말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의 라트비아대학 동아시아센터에서 있었던 회의에 참석하느라고, 동유럽에 위치한 이 나라를 처음으로 찾을 수 있었다. 회의 주제는 ‘동아시아의 풍경과 시’라는 것이었다. 어느 문화 전통에서나 자연이 예술의 소재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나, 풍경 또는 산수는 옛날부터 동아시아 문학과 예술의 특별한 주제였다. 또 여기에는 교훈이 있었다. 그것은 세속적인 명리--정치나 부를 높이 생각하지 않고 자연에 순화하면서 겸허하게 사는 것이 사람이 사는 방법이라는 것이었다.

자연 속에서, 한 뙈기의 밭을 갈아 굶주림을 없애고 조그만 오두막을 지어 추위와 더위를 피할 수 있다면, 인생은 그것으로 흡족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렇다고 이것이 고행의 인생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작년에 작고한 생태 철학자 아르네 네스는 자연 속에서의 검소한 삶이 기쁨과 자아실현을 위하여 가장 풍요로운 삶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여러 학문에는 그 나름으로 인간의 본성에 대한 기본 상정들이 들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인간(존 폴리티콘)’은 정치학의, 이윤 추구에 골몰하는 ‘경제인간’은 경제학의 인간 개념이다. 사회과학 아래에는 일반적으로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가정이 들어 있다. 그런데 동아시아 문학의 지혜는, 이러한 것을 넘어서 삶의 원형은 자연 환경과 전원의 삶에 있다는 것이다.

송시열처럼 정치와 이데올로기에 관심이 많았던 유학자도 서울을 향해 가면서, “조용히 산수의 뜻을 살펴보니, 내가 ‘정치의’ 풍진 세상으로 가는 것을 혐오한다(靜觀山水意 嫌我向風塵)”는 시를 썼다. 강조되는 것은 자연 속의 삶이 경제나 정치에 선행한다는 사실이다. 자연에 대한 이러한 인간의 관계는, 환경문제가 커지는 오늘에 있어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이번 회의에서 의미 있었던 것은, 적어도 나에게는, 라트비아를 방문한다는 사실 자체였다. 주최자가 그것을 생각한 것은 아니겠지만, 4박5일의 짧은 체제 중 주마간산격으로 살펴 본 리가와 라트비아는 기술 문명이 지배하는 오늘의 세계에서 특별하게 좋은 자연 환경, 지리적 환경을 가진 곳이었다. 라트비아 같은, 말하자면, 유럽의 변두리 국가를 방문한 것은 처음이었다. 수도 리가는 독일의 어느 도시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완전히 유럽적인 도시였다.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지금 라트비아는 유럽연합의 회원국이 되어있지만, 유럽은 역사적으로 상호 문화교류가 활발한 지역이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리가는 고풍한 느낌이 잘 보존되어 있는 도시였다. 리가의 구시가지의 조약돌 포장 길에는 석조와 벽돌의 옛 건물들이 어깨를 맞대고 빽빽이 서있었다. (고층 건물이 많지 않은 이곳에서 신흥 지역 쪽으로 높이 솟아있는 고층건물의 하나는 ‘삼성’이라는 광고판을 달고 있었다.) 간판이 없는 좁은 길들에 서 있는 건물들은 음침하면서도, 오히려 그것이 오래 눌러 살아 온 곳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구건물의 상당수는 자세히 보면 화려하게 장식을 새겨 넣은 건물들인데, 이것들은 19세기 말의, ‘유겐트슈틸’ 또는 ‘누보아르’라고 부르는 양식의 건물들로서, 이곳이 유네스코에서 누보아르 문화유산지역으로 지정한 곳이라고 했다.
과히 넓지 않은 강을 끼고 펼쳐진 공원의 푸른 나무와 잔디는 구시가지 전체를 자연의 일부가 되게 했다. 인구 70만의 리가는 우리 기준으로는 작은 도시이다. 사람이 북적대지 않는 공원은 시인이 시를 명상하면서 거닐 수 있는 한적한 곳이었다. 공원의 한 쪽에는 흰 주랑(柱廊)이 받쳐 든 오페라 하우스가 서있는데, 10월 한 달 내내 오페라, 콘서트, 발레 등이 하루도 빠짐없이 공연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입장료는 6000~7000원 정도인 것 같았다.)

도시도 오랜 시간 속에서 자연의 일부가 되는데, 리가는 그러한 도시였지만, 라트비아는 자연의 나라였다. 주최자인 프랑크 크라우스하르 교수의 호의로 나는 리가를 벗어나 라트비아의 시골을 돌아 볼 기회를 가졌다. 리가 시를 가로지르는 다우가바 강은 도시를 벗어나자 곧 강변을 채운 무성한 나무들과 그 위의 맑은 하늘을 비추면서 흐르고 있는 유유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 후에 이어서 농가들이 외롭게 서있는 초원이 보이기 시작했다. 특이하게 눈에 띄는 것의 하나는 집 곁에 전신주처럼 우뚝 솟아 있는 커다란 나무 기둥들이었다. 그 꼭대기에는 새둥주리를 받들고 있는 나뭇대들이 얹혀 있었다.

이것은 철따라 옮겨 오는 황새들을 위한 것이었는데, 한번 자리를 정하면, 같은 곳으로 돌아오는 것이 황새들의 습관이라고 했다. 드문드문 나타나는 농가들 가운데에는 폐가처럼 보이는 집들이 눈에 띄었다. 그것은 많은 경우 폐가가 아니라 건축 중인 집들이라고 했다. 새 집을 짓거나 귀농하는 사람들은 집을 짓다가 몇 년 그대로 덮어 두고 돈이 모이면 다시 계속해 짓고 하는 식으로 집을 짓는 데 그러한 집들이 폐가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거주지와 집의 진정한 뜻을 생각하게 하는 참으로 여유 있는 삶의 표현이었다. 원래 라트비아는 12세기부터 독일에서 진출해 온 모험가, 기사, 신부들이 개척하면서 유럽 문명권으로 들어가기 시작한 곳인데, 그러한 사람들의 성(城)들의 유적이 있다고 했지만, 그러한 성곽을 찾아보지는 못했다.

우리의 국도 넓이의 길에는 자동차가 많지 않았다. 우리가 갔던 도로의 상당 부분은 비포장 도로였다. 크라우스하르 교수의 설명으로는 인구밀도가 높지 않은 곳에는 포장도로가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라에서 하는 일은 계절에 따라 도로의 흙을 고르게 다지는 정도라고 했다. 사실 라트비아의 면적은 남한의 3분의 2 정도가 되지만, 인구는 230만명밖에 되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안정된 느낌을 주는 것이 주마간산으로 살펴본 라트비아였다. 그러나 지금 유럽을 휩쓸고 있는 금융위기를 라트비아가 피해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2008년 이후 라트비아 경제는 25% 정도가 축소되었는데, 금년 들어 경제가 상당히 회복되고 성장률이 3%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앞에서 이야기한 공원에서 며칠 사이에 나는 세 사람의 걸인을 보았다. 한 사람은 아코디언을 또 다른 사람은 트럼펫을 연주했는데, 재미있는 것은 마지막에 본 50대 후반이나 60대 초의 부인네였다. 그녀는 별로 날씬하지 않은 몸매를 흔들며 춤을 추고 있었다. 이들은 돈을 구걸하는 것보다는 공연에 대한 요금을 청하는 것이었다. 어떤 경우에나 주변에 사람이 많이 모여들지는 않았다.

저녁 무렵에는 호텔 근처의 길에 수레를 밀고 온 장사꾼들이 기념품을 팔다가 일정 시간 후에 짐을 거두었다. 금융위기 이후 실업률이 20%가 되었다고 하니 사회 불안이 적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것이 표면에 크게 드러나 보이지는 않았다. 내각을 뒤흔드는 정치적 혼란이 이어졌으나, 돔브롭스키스 총리는 몇 번의 연립 내각을 재조직하여 사태를 수습하였다.

역사적으로 볼 때도, 라트비아 사회의 평정은 표면적 인상에 불과한 것일 수 있었다. 라트비아만큼 오랫동안 외세의 각축장이 된 나라도 없을 것이다. 그 지역에 사람이 옮겨 온 지는 1만년이 넘는다고 했지만, 유사 이래 독일, 러시아, 스웨덴, 폴란드의 패권 쟁탈전이 끊임없다가, 정작 독립한 것은 1차 대전 이후의 20여 년간 그리고 소련이 붕괴하면서 있었던 1990년의 독립 선언 이후이다. 물론 이것은 정치 조직의 여러 가능성 가운데, 민족국가라는 단위만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 어떻게 도시를 만들고 문화를 이루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유지한 것일까? 이러한 점에서 문명의 인상은 주마간산의 피상적 인상일 수도 있지만, 피상적인 대로 그 인상이야말로 라트비아의 근본에 닿아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라트비아의 핵심은 정치와 사회 그리고 경제를 넘어 자연과 지리에 밀착한 삶에 있다고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홍콩 대학에서 온 허순이(何珣怡) 교수의 발표는 산과 물 등 지리적 조건에 민감한 <시경>의 시들을 논하는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사람의 근본은 가장 원초적으로 볼 때, 자연 환경을 이리저리 갈라놓은 지리적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상기하자는 것이 아시아적 통찰이었지만, 지금의 시점에서 동아시아 사회들이 이 통찰을 편안하게 현실화하였다고 할 수는 없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