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에 대한 시선
본문 바로가기
현장에 가다 /지난 시리즈

내 몸에 대한 시선

by 경향글로벌칼럼 2010. 9. 23.

환경을 공부하고 있는 학생으로서 어떻게 해서 이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했지만, 지루하고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가 될 것 같아 조금의 조율을 시간을 줘야겠다 하는 순간, 미국 생활과 각 나라를 나다니며 계속적으로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생각 중에 하나가 떠올랐다.

자연환경에 직접적으로 연관되지는 않지만, ‘사회적 환경에 관한 이야기. 시선.

이번에 처음으로 미국에 공부하러 오게 된 아가씨와 룸메이트로 지내고 있다. 꽤나 말라 보이는 몸에도 불구하고 식성이 좋아 간만에 냉장고에서 버리는 음식이 없어지는 것에 즐거워하는 나날.

함께 우적우적 음식을 해먹으며 간간히 이야기 하다 어느 한국에서의 아가씨들의 모임과 마찬가지로 몸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언니, 전 여기에 있으니까 제가 마른 건지 뚱뚱한 건지 모르겠어요. 너무 좋아요. 한국에 있을 땐 친구들 만날 때 마다 몸매에 신경이 가서 계속 스트레스를 받았거든요.”

까놓고 이야기해보자. 우리는 누군가의 몸에 대해 친절이라는 핑계 혹은 관심이라는 포장으로 얼마나 많이 살 좀 빼야겠다라는 말을 많이 해 왔는지.
그리고 그 잣대가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자. 내 몸의 주인이 누구인지 그 주체를 누구에게 전도했는지, 전도되어 왔는지도 생각해보자.

이런 이야기를 이미 집중적으로 조명한 학자가 있다. 푸코(Michel Foucault) 라는 이름은 한 번쯤 들어봤음 직한, 21세기에 새롭게 대두되는 많은 사회적 이슈, 학계의 관심에 중심이 되고 있는 철학가. (물론 Environmental Studies에서도 그의 관점은 계속적으로 회자된다.) 어쨌든 그가 시선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내가 내 신체를 가지고 겪었던 바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 몸은 내 것이 아니고 사회에 종속되어 있으며 그 사회의 혹은 다수의 감시 아래서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다고.

이것은 비단 몸에 대한 권리에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얼마나 타인의 삶에 관여하기가 쉬운가. 우리는 무수한 시간을 자신의 최선의 선택을 위해 쓴다.
그런 시간을 아주 간단하게 한 마디로 죽일 수 있다. 그리고 그 살육의 공간은 인터넷이라는 도구를 통해 더 넓게 쉽게 확장되어 버린다. 우리는 거대한 감시의 감옥아래에 살고 있다.



(이 양반이 푸코. 낯이 익다)


이런 이야기, 사실 많이 논의되었다. 식상하다. 하지만, 많이 나왔다는 것은, 그 만큼 밖에서 본 시선에서 볼 때 이 사회가 타인에 대한 관심이 이상할 정도로 많다라는 말과 연결된다.

운이 좋아 외국에 가본 사람이라면,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해방감을 주는지 안다. 어딘가를 떠나고 싶나? 훌쩍, 아무도 모르는 곳에

우리는 사회라는 구조로 정당화된 폭력적인 시선에 너무 관대한 건 아닌가.
이런 시선은 점점 더 확장되어 내 몸뿐만 아니라 내가 살고 싶은 방법, 내가 살아야 할 인생의 페이스 전부에 관여한다. 사회는 우리를 정신적 유아로 만들고 우리는 사회의 시선에 매달려 지낸다.
특이한 취향 재미있는 발상 그리고 지금 이야기 하고 있는 이런 당연한 이야기까지도 거대한 사회의 그물망에 이미 포섭되어있다. 
남들과 완전히 다른 삶의 방향처럼 보이지만, 자본주의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욕구 안에서서만 안전할 뿐이고, 진짜로 체제를 거부하는 그 순간, 아니 조금이라도 그 틀에 맞추지 않았을 때, 사회의 기준과 나의 불협화음으로 인해 모두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다 . 이것은 나의 과대망상일지도 모른다. 처음 글에서도 밝혔듯 나라는 그릇의 한계는 너무나 분명하니까. 

그럼에도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외부에서 무분별하게 쏘아대는 일반화된 정보에 개념 없이 받아들이고 그 시선을 타인에게 적용한다. 한 명 한 명의 속은 곪고 아파하는데. 그 한 명이 언젠가 내가 될 수 있다는 그 당연한 사실은 생각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환경에 대한 논의가 들어가는 것은 이 지점이다. 비슷하지 않은 것에 대한 혐오, 타인에 대한 일반화된 시선, 비슷해 보이지만 다른 문제에 똑같은 잣대로 접근하는 것이것은 환경뿐만 아니라 모든 소수(minorities or marginalized)라고 지칭되는 것들에 대한 학문의 근원이 된다.
역시 쉽지 않다. 이 공부를 계속하는 것은 내가 지금까지 받아왔던 많은 것들을 거부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데 아직도 나는 “도대체 저 가방은 어디서 구한 걸까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