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폭풍 잘 대처한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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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손제민의 특파원 칼럼

눈폭풍 잘 대처한 미국

by 경향글로벌칼럼 2016. 1. 26.

미국 동부에 ‘역사적인’ 눈폭풍이 상륙하기 몇시간 전인 22일 오전 11시(현지시간) 버지니아 페어팩스의 한 상점은 평소보다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의 표정에서 근심을 읽기는 어려웠다. 카트마다 물과 빵, 스낵 같은 비상식량 외에도 술이 빠지지 않았다. 대자연의 힘에 의해 강제로 집에서 쉬어야 할 향후 수십시간을 피할 수 없다면 즐기겠다는 태도로 보였다. 주유소에는 차량뿐만 아니라 드럼통에 기름을 담아 가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취학연령 이하 아이를 셋이나 둔 나는 전기가 끊어질 것이 가장 걱정됐다. 물과 라면, 땔감용 나무를 장만했다.

기상 캐스터들이 사흘 전부터 반복해서 ‘역사적인 눈폭풍이 온다’고 경고하며 대비하라고 할 때 ‘너무 겁을 주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뭐, 막상 대단치 않은 것으로 드러나더라도 손해볼 것은 없으니.

23일 출장을 떠날 일정을 준비하고 있던 나는 이틀 전 이미 항공사로부터 비행기가 뜰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 기간에 1만건 가까운 항공편이 취소됐다. 대부분 여행을 취소하거나 대안을 마련했기 때문인지 워싱턴 인근 세 곳의 공항에서 큰 혼란은 없었다. 아이들 학교는 눈폭풍이 오기도 전인 21일 기온이 많이 내려갔다며 휴교령이 내려졌다(대부분 학교는 도로에 눈이 완전히 치워지는 26일까지 쉰다).

미국 뉴욕 지하철 펜 역사가 10일 눈으로 뒤덮여 있다. 이날 폭설의 여파로 미 동부 관공서는 문을 닫았고 며칠째 눈이 쏟아진 워싱턴 지역의 학교에는 휴교령이 내렸다. 중서부 일대는 폭설과 한파까지 겹치면서 11명이 숨지고 1000여편의 항공기 운항이 중단됐다. _AP연합뉴스


22일 오후가 되면서 예고대로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뮤리엘 바우저 워싱턴 시장은 시 경찰청장, 교육감 등을 대동하고 기자회견을 열어 “이번 눈폭풍은 사활이 걸린 문제(life and death implications)”라며 오후 3시까지는 길 위에 차들이 남아 있으면 안된다고 강조했다. 취임 1년 된 40대 초반 흑인 여성 시장 바우저는 눈폭풍 예보가 내려진 일주일 전부터 “내린 눈은 치우면 된다. 전기가 끊어지는 것이 가장 우려스럽다”며 빈민가에서 전기가 나갈 경우 사람들을 따뜻한 곳으로 옮길 대책을 마련해둔 터였다.

방송들은 페어팩스 카운티 교통운수국 소금창고 앞에 기자를 상주시키며 제설 준비 상황을 매시간 보여줬다. 빌 드블라지오 뉴욕 시장과 앤드루 쿠오모 뉴욕 주지사는 차량 통행금지령을 내렸다. 제설 작업이나 치안을 담당하는 공무용 차량 이외에 일반 차량이 도로에 나오면 체포될 수 있다는 설명까지 덧붙였다.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에 출마한 크리스 크리스티 뉴저지 주지사는 자기 주가 눈폭풍의 직접적 영향권에 든다는 소식에 선거운동을 접고 뉴저지로 돌아갔다. “내가 주지사로 있는 동안 눈으로 인한 비상사태가 17번째다. 우리는 매뉴얼대로만 하면 된다”고 안심시켰다. 22일 저녁부터 굵어진 눈발은 그 후 약 30시간 동안 11개 주 8500만명이 사는 지역을 덮어버렸다. 적게는 50㎝ 많게는 1m가량의 눈이 쌓였다. 23일 내내 사람들은 정말 거의 밖에 나오지 않았다. 옥외 경제 활동은 전면 중단됐다. 돈 한 푼 더 버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떤 무시무시한 독재자가 밖에 나오지 말라고 겁을 주어도 그랬을까. 생명과 안전이 최우선이라는 사회적 합의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24일 아침 거짓말같이 눈이 멎었고 파란 하늘과 화창한 햇빛이 사람들을 밖으로 인도했다. 아파트에 세워둔 차량들은 누구 차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눈에 뒤덮였다. 평소 데면데면하던 이웃들은 저마다 나와서 하루 종일 삽질을 하며 얼굴을 마주해야 했다. 어떠한 의무에서도 자유로운 아이들은 하루 종일 눈 위에서 뒹굴었다. 엄청난 경제적 손실이 났지만, 지나칠 정도로 미리 경고하고 대비한 덕인지 ‘역대급’ 눈폭풍에도 인명피해가 많지 않았다. 적어도 재난에 관한 한, 미국 지방정부는 혹한과 혹서에 취약한 사람들의 생명과 안전에 돈보다 우선 가치를 둔다는 생각이 다시금 들었던 며칠이었다.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대자연이 강제하는 비상사태가 점점 잦아진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지 않을까.


손제민 워싱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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