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감 아래 베이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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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박은경의 특파원 칼럼

독감 아래 베이징

by 경향글로벌칼럼 2018. 2. 28.

“영하 20도의 하얼빈 겨울을 견뎌온 장인어른에게 베이징의 추위는 대수롭지 않았다. 그날도 감기에 걸릴까 걱정하는 아내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볕이 좋다며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켰다. 웃옷도 입지 않은 채였다.”

 

수많은 중국인들의 마음을 뒤흔든 글 ‘유행성 독감 아래 베이징의 중년’은 이렇게 시작된다. 장인이 감기가 든 ‘그날’부터 사위가 써내려 간 29일간의 기록이다. 공개된 지 3일 만에 8만명이 ‘좋아요’를 눌렀다. 클릭 수는 2000만 건에 달한다.

 

콧물로 시작된 장인의 감기는 점점 심해져 약을 먹어도 차도가 없었다. 동네 병원에서 링거를 맞을 때만 해도 그저 심한 감기인 줄 알았다. 그러나 상태가 악화돼 큰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가서야 유행성 독감 판정을 받았다. 장인은 중환자실에서 기관 삽관, 인공 폐 이식까지 했지만 결국 한 달도 안돼 지난달 24일 세상을 떠났다.

 

이 글은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극한 슬픔을 묘사하지 않고 일기 형식으로 객관적 서술에만 충실하다. 이런 차가운 글이 뜨거운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이유는 기록 속에 드러난 중국 의료제도의 문제점 때문이다. 중국 의료보험은 전국적으로 통합 운영되지 않는다. 호적 주소지가 아닌 다른 지역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 환자가 치료비를 우선 부담하고, 각종 서류를 챙겨 호적지에 신청해야 한다. 치료비를 지급받는 데 보통 1년쯤 걸린다.

 

글쓴이는 전형적인 베이징의 중산층이다. 금융계에 종사하는 그는 집도 있고 차도 있고, 저축액도 넉넉했지만 하루 350만원에 달하는 중환자실 비용을 계속 감당하기는 버거웠다. 그가 느낀 고충에 환자와 환자 가족뿐 아니라 의료계, 법조계까지 공감하고 허술한 의료보험 체계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시진핑 주석이 추진해 온 의법치국은 법에 의한 통치를 강조한다. 허술하고 모호한 법을 단단히 세우는 데 주력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중국인들을 보호하기엔 여전히 부족하다. ‘유행성 독감 아래 베이징의 중년’과 함께 온라인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글이 ‘신시대 장커우커우 열전’이다. 장커우커우는 실존 인물이다. 30대 퇴역군인인 그는 춘제 연휴 첫날인 15일 22년 전 어머니를 죽인 왕씨 부자 3명을 찾아가 살해했다. 두 집은 토지 경계 문제를 두고 싸움이 붙었고 그 과정에서 장커우커우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왕씨의 셋째 아들이 살해범으로 지목됐고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가벼운 판결을 받았다. 엄중한 처벌을 피하기 위해 살인범으로 조작한 것 아니냐는 의심이 나왔지만 조사부터 판결까지 제대로 된 것이 없었다. 법으로 원한을 풀 수 없었던 장커우커우는 군에 입대해 특공무술을 배웠고 복수를 결행한 후 자수했다. ‘열전’에서는 장커우커우가 어머니의 죽음을 복수한 효자, 허술한 사법 체계에 항거해 악인을 단죄한 신시대 영웅으로 묘사돼 있다.

 

법을 근간으로 한 시진핑 신시대가 시작됐지만 법은 여전히 인민들의 편이 아니다. 제때 적절한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고, 치료비까지 걱정해야 한다. 법의 심판이 허술해 개인이 징벌에 나서야 한다. 그런데도 중국 공산당은 의법치국을 내세워 국가주석과 부주석의 3연임 제한을 규정한 헌법 규정 삭제에 나섰다. 언론들은 의법치국을 내세워 개헌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당의 영도에 따라야 한다’는 붉은 현수막이 나부끼고 있다. 댓글은 차단되고 인터넷 방화벽은 높아졌다. 개정안이 통과될 전국인민대표대회 개막에 맞춰 시 주석 업적을 찬양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대단하다 우리나라>가 개봉된다.

 

민중은 마음의 ‘독감’을 앓고 있는데 지도자들은 이상한 약만 처방하면서 권력에 몰두하고 있다. 중국은 헌법에서 인민들의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헌법 1장 2조는 중화인민공화국의 모든 권력은 인민에게 있다고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 이마저도 바꿀 게 아니라면 충실하게 지켜야 한다.

 

<베이징 | 박은경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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