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난다고 하자 “수영장에 물 채우면 안갈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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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 가다 /리비아 서바이벌

떠난다고 하자 “수영장에 물 채우면 안갈 것”

by 경향글로벌칼럼 2011. 9. 2.

“좋은 아침입니다. 오전 4시 전에 이 종이를 문밖에 걸어두시면 아침식사를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콘티넨탈 식사는 신선하게 짜낸 오렌지 주스와 크루아상, 토스트, 대니시 패스트리가 담긴 빵 바구니, 갓 내린 커피나 차로 준비됩니다. 알 와단(Al Waddan)만의 아침을 주문하실 경우 기름에 살짝 튀긴 양고기에 양파와 향신료를 첨가한 리비아 전통음식인 ‘글라야(glaya)’를 맛보실 수 있습니다.”


기자가 머물고 있는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의 알 와단 호텔 방에는 이 같은 내용의 아침식사 룸서비스 메뉴판이 아직도 문에 걸려 있다. 반군이 총을 들고 다니는 현실(이 호텔은 반군이 기숙사로 쓰고 있다)과는 어울리지 않지만 이 호텔은 이탈리아 식민지 시절인 1936년 지어진 이후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는 트리폴리 시내 유명 호텔 가운데 하나다. 1942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과 영국 연합군이 북아프리카에 상륙해 트리폴리에 미군 기지를 만들었고, 미군은 무아마르 카다피가 혁명으로 집권한 뒤인 1970년에 철수했다. 


미군 주둔 당시 1960~70년대 유명 팝 듀오 사이먼 앤 가펑클과 영화배우 숀 코너리 등이 이 호텔에 머물렀다고 한다. 규모는 작지만 대리석으로 장식돼 있는 호텔은 꽤 괜찮은 부티크 호텔 같아 보였다.

 

호텔 입구의 카다피 사진 한 리비아 남자가 1일 수도 트리폴리의 코린시아 호텔 입구 바닥에 놓인 무아마르 카다피 국가원수의 사진을 밟고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트리폴리 _ AFP연합뉴스



■ 호텔 지하엔 무슬림 기도실


하지만 현재는 정상 가동을 멈춰, 180~200명 규모의 직원들도 대부분 떠난 상태다. 호텔 지하로 내려가 봤다. 무슬림들을 위해 기도하는 작은 기도실이 있었고 폐쇄회로(CC)TV를 관리하는 보안실, 기계실 등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 문은 야외 수영장으로 이어졌다. 야자수 한 그루가 서 있는 수영장에는 물이 말라버린 지 오래다. 하긴 먹을 물과 씻을 물도 부족한 상황에서 야외 수영장이라니 언감생심이었다. 야외 수영장 옆 건물에는 사우나 시설과 여러 운동기구를 갖춘 피트니스룸이 있었는데,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사우나나 수영을 끝내고 음료나 간단한 식사를 할 수 있는 레스토랑과 커피숍 역시 문이 닫혀 있었다. 


메인 레스토랑의 이름은 알 미단. 프로젝션 TV가 설치돼 있는 이 고급 레스토랑에서는 식사도 즐길 수 있고, 야외 테이블에서는 중동 사람들이 즐기는 물담배인 시샤도 피워볼 수 있다. 실제 여러 개의 시샤가 나뒹굴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식사는 정오부터 오후 11시까지 먹을 수 있다. 16장에 달하는 메뉴판에는 해산물 펜네, 야채 라자냐, 스파게티 봉골레, 새우 리조토 등 이탈리아 음식은 물론 농어구이·양고기 스테이크 등 메인 요리와 홈메이드 초콜릿 무스·티라미수 케이크 등 디저트도 사진과 함께 적혀 있었다. 물이 안 나와 씻지도 못하는 상황에서는 문자 그대로 ‘그림의 떡’이었다. 커피를 워낙 좋아하는 터라 커다란 커피잔에 가득 담긴 블랙커피를 보자 바로 입맛이 당겼다.


2년 전 호텔을 개조한 뒤 운영을 맡았던 인터콘티넨탈그룹은 이번 내전이 터지자 잠정적으로 리비아에서 철수했다. 호텔은 반군을 돕는 일부 리비아인 직원과 반군이 함께 운영하고 있다. 이 호텔에서 1년 정도 근무한 엔지니어 타레크 엘테리키(42)는 “반군이 오기 전인 3월쯤부터 이 호텔에는 리비아인, 카다피군, 저널리스트들이 함께 머물기 시작했다”며 “호텔 안에 카다피군이 권총을 들고 들어오는 것을 본 적도 있다”고 말했다. 


■ 자원봉사자·반군 함께 운영


반군이 들어오기 전까지 4층 스위트룸은 모두 카다피군과 용병들의 차지였다고 한다. 자신의 동료들을 죽인 바로 그 총을 보고 그는 많이 울었다고 했다.


그래서 지금은 반군을 도와 호텔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엘테리키는 “물과 음식은 물론 뭐든 힘이 닿는 대로 반군을 돕고 있고 매우 행복하다”고 말했다. 우리가 신세를 졌던 이프라트 음식이나 간간이 마련됐던 차나 주스도 엘테리키의 동료인 호텔 요리사가 호텔에 저장돼 있던 재료로 만든 것이라고 했다. 지금은 반군이 4층 스위트룸을 쓰고 있다.


1일 튀니지로 건너갈 것이라는 말에 엘테리키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얼른 수영장에 물을 채워야겠다. 물이 채워진 수영장을 보면 너무 좋아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농담을 건네면서 “언제라도 다시 자유로운 리비아를 방문해달라”고 했다.


<트리폴리에서>


이지선 기자 js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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