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제재 계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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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재 계산표

by 경향글로벌칼럼 2017. 8. 3.

미국 의회가 지난달 27일 러시아를 제재하는 법안을 밀어붙였다. 러시아가 화를 내는 건 당연한데 유럽도 화가 났다. 독일 지그마어 가브리엘 외무장관은 “미국이 관할을 넘어 유럽 기업을 제재하는 건 절대 수용할 수 없다”고 했다. 장-클로드 융커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도 지난주 “우리의 우려가 충분히 고려되지 않으면 법 시행 후 EU는 수일내 적정한 조치를 취할 준비가 돼 있다”고 경고했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러시아 제재에 같이 동참하고 있는 유럽이 왜 미국에 화를 내는 걸까. 가스관 때문이다. 미국은 이번 제재 법안에서 기존 러시아 제재에 “러시아 가스관 수출의 건설·복구 사업에 투자하거나 물자 및 기술, 서비스 등을 제공하는 기업을 제재할 수 있다”는 조항을 더했다. 법안은 러시아에서 독일로 오는 가스관 확장사업인 노드스트림2 프로젝트를 콕 찍어 “EU의 에너지 안보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어 반대한다”고 적었다. 본심은 뒷문장에 있다. “미국 정부는 미국인의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 에너지 수출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

 

독일은 이를 놓고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를 넘어선 ‘무엇보다 미국(America Above All)’이라고 했다. 미국의 가스 수출을 늘리려고 러시아 제재를 이용했다는 얘기다. 발트해저 1200㎞에 깔린 노드스트림은 동유럽을 거치지 않고 러시아 브이보르그에서 독일 그라이프스발트로 바로 가스를 보낸다. 노드스트림2가 놓이면 러시아에서 유럽으로 오는 가스의 80%가 독일을 거쳐가게 된다. 독일이 중계지가 되는 셈이다. 독일의 이권만 걸린 게 아니다. 러시아 국영 가스프롬이 주도했지만 이 사업에는 독일의 유니퍼와 윈터셀, 프랑스의 엔지, 영국·네덜란드 합작 로열더치셀, 오스트리아의 OMV 등 서유럽의 에너지 대기업이 참여하고 있다.

 

배로 대서양을 건너야 하는 미국의 액화천연가스(LNG)는 그간 러시아의 값싼 가스값에 밀려 유럽시장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러시아는 유럽 가스의 34%를 공급한다. 노드스트림2가 깔리면 40%를 넘을 수 있다. 러시아 의존도를 낮추고 수입처를 다변화해야 하지만 시장을 좌지우지하려 드는 미국을 보는 유럽의 마음은 불편하다. 가스관 밸브가 언제든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러시아든, 미국이든 일방적 사업자는 달갑지 않다.

 

러시아 제재 법안은 동·서유럽을 찢어놓는 원심력으로 작용할 게 뻔하다. 동유럽 국가들은 노드스트림2 사업을 반대해왔다. 가스가 독일로 바로 오면 경유 수수료를 뺏기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폴란드가 타격이 제일 크다. 이들 나라가 빼앗길 경유 수익을 가져가는 중유럽은 독일 편에 서 있다. 미국은 러시아에 대한 불안감, 서유럽을 향한 경제적 박탈감이 심한 동유럽을 끌어당기고 있다. 지난달 독일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폴란드를 찾은 건 서막이었다. 마이크 펜스 부통령은 지난달 30일부터 에스토니아 등 동유럽을 순방 중이다.

 

국익을 그럴듯한 명분으로 포장하는 게 외교라지만 미국은 이번에 대놓고 ‘얌체짓’을 했다. 그런데 미국은 제대로 계산기를 두드린 걸까. 미국 기업들도 의회에 반대 로비를 벌였다. 엑손모빌, GE, 셰브론 같은 에너지 기업뿐 아니라 보잉, 씨티, 마스터카드, 포드 등이 제재 때문에 러시아보다 미국 산업에 손해가 클 거라고 걱정했다. 러시아가 관련된 극지방, 심해 유전 개발부터 금융 거래, 주요 광물 수입까지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지금 세상에 미국만 이익을 보는 글로벌 비즈니스란 없는 법이다.

 

트럼프 정부 출범 후 전통의 우방 미국과 유럽 사이는 껄끄럽기만 하다. 파리 기후변화협정,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방위분담금 문제에 이어 가스관은 그 간격을 더 벌려놓을 듯하다. 미국과 유럽이 멀어질수록 러시아가 움직일 공간은 더 커진다.

 

국제부 이인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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