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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너가 사람을 만든다

by 경향글로벌칼럼 2018. 5. 8.

1968년은 다사다난한 해였다. 그해 4월 미국의 흑인 민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 목사가 사망했고, 반전·평화를 외쳤던 5월 혁명의 물결이 유럽을 휩쓸었다. ‘그 후 50년이 흐르는 동안 전쟁은 끝났고 차별은 옳지 않다는 인식이 자리잡았다’고 단언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 지난달 12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에서 일어난 작은 소동은 우리 안의 차별 의식이 얼마나 뿌리 깊고 완고한 것인지 돌아보게 만들었다.

 

23세 동갑내기 사업가인 레이션 넬슨과 돈테 로빈슨은 이날 필라델피아의 한 스타벅스에서 또 다른 사업 파트너 앤드루 야프를 기다리고 있었다. 넬슨과 로빈슨은 스타벅스 직원에게 “음료를 아직 주문하지 않았지만 화장실을 사용해도 되느냐”고 물었다. 직원은 야멸차게도 “안된다”고 대답했고 급기야 이 두 사람에게 “매장에서 나가달라”고 요구했다. 넬슨과 로빈슨이 나가지 않자 직원은 경찰을 불렀다. 넬슨과 로빈슨은 흑인이었다.

 

야프가 스타벅스에 막 도착했을 때 경찰은 두 흑인 청년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고 있었다. 넬슨과 로빈슨이 체포되는 영상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확산되면서 이 사건은 미국 사회에 후폭풍을 일으켰다.

 

미국 인구조사국과 하버드대, 스탠퍼드대가 공동 진행 중인 ‘기회균등 프로젝트’는 미국 사회 저변에 흐르고 있는 차별의 실상을 보여준다. 프로젝트의 일환인 ‘미국의 인종과 경제적 기회’ 보고서를 보면 30대 흑인 남성의 99%는 비슷한 가정환경에서 성장한 또래 백인 남성보다 소득 수준이 낮았다.

 

이는 부유층도 다르지 않았다. 소득 5분위(최상위) 가정에서 자란 흑인과 백인 소년을 추적해보니 30대가 됐을 때 하위 계층으로 떨어진 비율이 백인보다 흑인에서 더 높았다. 똑같이 ‘금수저’로 태어났더라도 어른이 된 후 여전히 금수저를 물고 있는 쪽은 백인이 더 많더라는 얘기다. 경제적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비율도 백인이 더 높았다. 소득 1분위(최하위) 가정의 백인 소년이 성장해 5분위 가정을 꾸리는 비율은 10.6%였지만 흑인은 2.5%에 그쳤다. 사회에 나와 창업을 하거나 일자리를 구해 소득을 올리는 과정에서 흑인은 알게 모르게 이런저런 차별을 당하고 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한국이라고 다를까. 한국인도 차별에선 어디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것이다. 동남아시아 출신 이주 노동자 상당수가 일터에서 사람다운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다문화가정의 자녀들이 ‘혼혈’이라고 놀림당하는 일도 빈번하다. 인종 차별뿐 아니라 경제적 차별도 만연한 곳이 한국이다. 부자가 빈자를 괄시하고 고용주가 피고용인에게 ‘갑질’한다. 부모가 어린 자녀에게 ‘임대아파트에 사는 애들과 놀지 말라’고 주의를 준다는 것은 과장 섞인 풍문이 아니라 엄연히 실재하는 일이다.

 

다시 필라델피아로 돌아가자. 경찰에 체포된 넬슨과 로빈슨은 당연하게도 무혐의로 풀려났다. 스타벅스는 두 청년을 경찰에 신고했던 직원을 해고하고, 두 청년에겐 온라인에서 대학 강의를 무료 수강할 기회를 제공하기로 했다. 두 청년은 필라델피아시 당국과도 합의에 이르렀다. 소송을 걸어 거액의 손해배상을 받을 수도 있었겠지만 상징적인 합의금 1달러씩만 받고 소송하지 않기로 했다. 그 대신 시 당국이 기금 20만달러(약 2억1500만원)를 조성해 자신들과 같은 젊은 사업가를 지원하도록 했다.

 

스타벅스 직원과 경찰은 넬슨과 로빈슨을 수상한 이등시민으로 취급했지만 이 사건의 결론은 어떠한가. 정작 박수받을 만한 행동을 한 사람들은 두 청년이고 스타벅스와 경찰엔 비난이 쏟아졌다. 국적을 막론하고 타인을 대하는 태도가 한 사람의 품격을 완성하는 법이다. 이 품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의 말로는 대한항공 조씨 집안사람들이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최희진 국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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