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흙수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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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손제민의 특파원 칼럼

미국의 흙수저들

by 경향글로벌칼럼 2016. 3. 1.

지난 1월 어느날 미국 버지니아의 버니 샌더스 선거사무실 안내데스크에 앉아있던 자원봉사자는 한국계였다. 30대 중반인 그는 연방수사국(FBI) 직원이라는 신분상 제약 때문에 자세한 신원 정보를 명시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돈을 모금하지는 못하지만 자기 집에서 전화로 샌더스에 대한 투표를 독려하는 ‘폰뱅크’ 행사를 열기도 하고, 비번인 날 선거사무실에 나와 몸으로 도울 수 있는 일을 한다고 했다.

그의 부모는 1970년대에 미국으로 이민 온 다른 한인 이민자들처럼 어렵게 살았다. 그는 대학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해병대에 입대했고 이라크 전장에 배치됐다. 뒤늦게 동부의 유명 사립대를 졸업했다. 서른 살이 넘어 남들이 선망하는 직장을 얻었지만 20만달러의 등록금 빚을 갚느라 결혼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한국말이라고는 ‘해병대’ ‘미역국’ 등 몇 단어밖에 모르는 그는 한국에서 ‘흙수저(dirt spoon)’라는 말이 유행한다는 설명에 “거기도 정치혁명이 필요한 것 같다”며 웃었다. 정치혁명은 많은 유권자들이 투표하러 나옴으로써 1%를 위한 정부가 아니라 99%를 위한 정부를 만들 수 있다는 샌더스의 슬로건이다.

이 청년은 대학을 마쳤고, 정규직 직장이라도 있기에 나은 편이다. 지난달 뉴햄프셔에서 만난 23세 여성 퀸란은 공부를 더 하고 싶었지만 대학 학비를 감당할 수 없어 식당 종업원 일을 하고 있다. 전날 밤까지 일한 탓에 피곤해 보이는 그는 ‘공립 대학교육 무상화’를 진지하게 거론하는 사람이라도 있어서 투표장에 나왔다고 했다. 처음으로 해보는 투표였다. 아이오와에서 만난 트럭운전사 존 터너는 대학 졸업 후 15년이 넘도록 빚을 다 갚지 못해 자식들에게 그 빚을 넘겨주지나 않을까 걱정된다고 했다.

학비 빚은 ‘흙수저’에 해당하는 대다수 미국 젊은이들이 짊어져야 하는 숙명이 됐다. 결혼을 미루는 요인이며, 자기 자녀들의 미래에 낙관적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지자와 사진을 찍고 있는 버니 샌더스 미 상원의원_AP연합뉴스

주로 1980년대 이후에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는 정치적으로 조직되기 어려운 세대로 여겨져왔다. 관심 분야가 다양한 데다 대부분 생활에 허덕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대선은 이 세대를 다시 보는 계기가 됐다. 젊은층 투표 참여율은 역대 어느 때보다 높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들을 모아낸 사람이 74세 최고령 대선후보인 샌더스라는 점이 역설적이다. 이 세대는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보다 샌더스를 더 지지한다. 힐러리는 ‘왜 젊은층이 당신보다 샌더스를 더 좋아한다고 보느냐’는 물음에 즉답하지 않은 채 자신도 젊은층의 마음을 얻고 싶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하버드대 정치연구소가 지난해 11월 18~29세 연령대 2011명을 상대로 한 조사에서 1년 전만 해도 이들 사이에 샌더스는 인지도가 없어 지지율이 1%에 그쳤다. 불과 1년 사이 힐러리 지지율을 앞질렀다. 이들은 ‘사회주의’라는 말도 개의치 않았다. 그 말 때문에 샌더스를 더 좋아한다(24%)는 사람도 있었고, 사회주의라도 아무 상관 없다(66%)고 한 사람도 많았다. 이들이 꼽은 좋은 대통령의 덕목은 진실성, 침착함, 진정성이었다. 정치나 사업 경험은 후순위였다. 지금의 상황을 초래한 주류에 대한 강한 불신을 엿볼 수 있다.

지난해 10월 첫 TV토론회 직후 샌더스의 지지율은 급락했다. 힐러리가 말을 잘했다는 이유로 주류언론들이 재빨리 힐러리의 승리를 선언하고 샌더스를 의도적으로 무시한 영향이 컸다. 힐러리를 지지하는 흑인이 많은 남부 주들의 경선이 치러지는 슈퍼화요일 이후 이런 분위기는 다시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샌더스 캠페인 자원봉사를 위해 캘리포니아에서 뉴햄프셔까지 온 심리치료사 도널드 슈베르트(65)는 자신도 참여한 1970년대 베트남전 반대운동 당시 대학가의 열기를 떠올렸다. “당시 기성세대와 주류언론은 우리를 무시했다. 하지만 길게 보면 미국을 바꾼 것은 그 젊은이들이다.”


손제민 워싱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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