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치 망가뜨리는 트럼프의 ‘음모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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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박영환의 워싱턴 리포트

미국 정치 망가뜨리는 트럼프의 ‘음모론’

by 경향글로벌칼럼 2017. 3. 7.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출생지가 미국이 아니라는 ‘버서 논란’으로 유명세를 얻었고, 대통령이 된 후에는 과반 득표를 못한 이유는 ‘투표 조작’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측근들이 줄줄이 연루되면서 러시아 스캔들이 권력의 정당성을 흔들자 이번에 꺼내든 카드 역시 ‘오바마의 도청’이란 음모론이다.

 

트럼프가 트위터를 통해 오바마의 도청 의혹을 꺼내자, 백악관은 이튿날인 5일(현지시간) 의회 차원의 조사를 요청했다. 션 스파이서 백악관 대변인은 성명에서 “2016년 대선 직전 정치적 목적의 수사가 있었을 수 있다는 우려에 관한 보도는 매우 걱정스러운 것”이라면서, 지난해 대선 때 행정부가 수사권을 남용했는지 의회 정보위가 조사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공화당 소속 데빈 누네스 하원 정보위원장은 “대선 때 정부가 특정 정당의 캠페인, 혹은 측근들을 감시했는지 조사하겠다”며 호응했다. 러시아 스캔들과 도청 의혹을 같은 비중으로 조사하겠다는 것이다.

 

트럼프와 백악관은 도청 의혹을 뒷받침할 근거는 전혀 제시하지 않았다. 트럼프가 “워터게이트감”이라며 제기한 의혹의 근거는 극우 매체 브레이트바트의 엉성한 보도가 전부였다. 심지어 그 보도에서도 도청이 있었는지, 오바마가 지시했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백악관은 의혹만 터뜨린 후 조사가 이뤄질 때까지는 이 사안에 대해 “언급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트럼프는 5일 트위터에서 오바마도 과거 대선 전에 러시아 측과 뒷거래를 했다는 식의 글을 올렸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AFP 연합뉴스

 

트럼프의 백악관은 아무 증거 없이 ‘도청’이 ‘보도됐다’며 ‘수사대상’으로 끌어올렸다. 전임 행정부를 향한 밑도 끝도 없는 비방은 수사·정보당국의 권위까지 뒤흔들고 있다. 연방수사국(FBI) 제임스 코미 국장은 트럼프의 도청 주장이 사실이 아니란 점을 공표해줄 것을 법무부에 요청했다. 그러나 트럼프 측근 제프 세션스 장관이 이끄는 법무부는 이를 거절했다. 정작 세션스는 트럼프가 물타기하려는 러시아 스캔들의 주역 중 한 명이다.

 

워싱턴포스트는 “규범과 전통을 무시하는 트럼프의 낯익은 전술”이라며 “트럼프는 화제를 바꾸고 싶을 때면 자주 앙상한 음모론의 마른 가지에 성냥불을 댕기곤 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트럼프가 음모론에 불을 댕길수록 러시아 스캔들에 대한 대중의 의혹은 오히려 커질 수밖에 없다. 제임스 클래퍼 전 국가정보국장은 NBC 인터뷰에서 “대선 때 어떤 도청도 없었다”고 일축했다. 오바마 백악관의 대변인을 지낸 조시 어니스트는 방송에 나와 “스캔들이 커질수록 (트럼프의) 트위터는 점점 더 터무니없어진다”고 비난했다. 공화당의 마르코 루비오 상원의원은 NBC에서 “나는 마녀사냥은 물론 은폐공작에도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트럼프의 잇단 음모론 속에 미국 정치는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음모론 정치는 무엇이 진실인지에 대한 대중의 판단을 흐리고, 유권자들의 정치 불신을 조장한다. 정치 전략가 매튜 다우드는 워싱턴포스트에서 “우리는 초현실 세계에 있다”고 꼬집었다.

 

박영환 특파원 yh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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