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미국, 총기규제 염원 외면하면 문명국 자격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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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

[사설]미국, 총기규제 염원 외면하면 문명국 자격 없다

by 경향글로벌칼럼 2018. 3. 26.

미국 워싱턴과 뉴욕을 비롯한 800여개 도시에서 24일(현지시간) 총기규제 강화를 촉구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지난달 총기난사 사건으로 17명이 희생된 플로리다주 마조리 스톤맨 더글러스 고교의 생존학생들이 주도한 ‘우리의 생명을 위한 행진’에는 초·중·고교생과 교사, 학부모 등 각계각층 시민이 참여했다. 워싱턴 집회에만 80만명(주최 측 추산)이 참가할 만큼 열기가 뜨거웠다고 한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트위터를 통해 지지를 표명했고, 배우 조지 클루니와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등은 기부금으로 힘을 보탰다. 한 연사는 “혁명에 오신 것을 환영한다”며 자신들의 운동을 ‘혁명’으로 규정했다. 슬픔과 고통을 딛고 일어나 거대한 변화의 흐름을 만들어낸 젊은이들의 용기에 찬사를 보낸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미국은 ‘총기의 나라’다. 민간인 보유 총기 수가 2억7000만~3억정으로 추산된다. 인구가 3억2600여만명인 점을 고려하면 사실상 1인 1정꼴이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1999년 컬럼바인 고교 사건 이후 최소 193개 학교에서 18만7000여명이 총격사건을 경험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총기규제가 강화되지 않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우선 ‘무기 소지 및 휴대에 관한 권리’를 규정한 수정헌법 제2조가 역사·문화적 배경으로 작용한다. 미국 최대의 이익단체인 미국총기협회(NRA)의 강력한 로비는 정치적 장애물이다. 연방 상·하원 의원들은 총기사건이 발생하면 충격과 분노를 표시하지만 그때뿐이다. 규제 강화 입법에 적극 나서거나 NRA에 정면으로 맞서는 이들은 거의 없다. NRA가 쏟아붓는 후원금이 끊길까 두려워서다. 돈 때문에 수많은 생명이 스러지고 있으니, 이런 야만이 없다.

 

더글러스 고교 사건 이후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학교 내 총기 참사를 막기 위해 ‘교사를 무장시키자’고 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 또한 공화당의 전통적 자금줄인 NRA를 의식해 근본적인 규제 강화는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집회에 대해서도 백악관이 “수정헌법 1조의 권리(언론·출판·집회의 자유)를 행사하는 미국인들에게 박수를 보낸다”고 했을 뿐, 트럼프는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새로운 사회운동의 주역으로 등장한 청소년들의 요구에 계속 침묵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무고한 시민의 죽음을 막거나 줄일 수 있는 길이 있는데도 방치하는 것은 문명국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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