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더스는 끝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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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손제민의 특파원 칼럼

샌더스는 끝났는가

by 경향글로벌칼럼 2015. 12. 15.

“주류 언론들이 버니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려는 것이 느껴져요.” 버니 샌더스 지지자 모임에서 만난 적이 있는 간호사 레슬리 크레이거를 다시 마주친 것은 열흘쯤 전 크리스마스트리를 사기 위해 들른 동네 벼룩시장에서였다. 크레이거는 비싼 의료비와 간호사들의 노동조건을 비판하며 샌더스를 지지한다. 지난 10월 중순 민주당 첫 TV토론회가 펼쳐지던 날 밤 자신의 집에서 ‘하우스파티’를 열 당시의 그는 들뜬 열의로 가득 차 있었지만 이제는 좀 화가 나 있는 듯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 그의 불만에 근거가 있음을 보여주는 자료가 나왔다. 미국 3대 방송사(ABC, CBS, NBC)의 황금시간대 뉴스를 모니터하는 블로그 ‘틴달 보고서’에 따르면 방송 3사가 지난 1년간 메인뉴스에서 트럼프를 별도 꼭지로 다룬 시간은 모두 234분에 달한 반면, 샌더스는 10분에 그쳤다.

트럼프가 대선 후보가 될지도 모르는 공화당 1위 주자이고 샌더스는 힐러리 클린턴에 이어 민주당 내 2위를 달리는 주자여서 관심도에 차이가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이 각각 프라이머리 유권자들에게 받는 지지율이 20~30%대로 비슷하다는 점에서 이렇게 차이가 날 정도는 아니다. 샌더스는 자신보다 지지도가 낮은 테드 크루즈, 젭 부시, 크리스 크리스티 등 상대 정당의 다른 후보들보다 보도 시간이 짧았다. 샌더스 캠프는 이를 인용해 “거대기업이 소유한 미디어가 버니의 반(反)기득권적 견해를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국 민주주의를 위해 버니에 대해서도 다른 후보들만큼 보도해야 한다”는 성명을 냈다.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 버니 샌더스_AP연합뉴스


기업 광고에 수입의 대부분을 의존하는 주류 언론이 반기득권적 견해를 가진 정치인을 좋아할 리는 없다. 하지만 반기득권이라는 점에서는 트럼프도 뒤지지 않는 사람 아닌가. 트럼프는 공화당 주류에 반기를 든 아웃사이더로서 연설할 때마다 직업 정치인들을 조롱한다. 다만 두 사람의 반기득권론이 이들의 정치적 지향만큼이나 정반대에 있을 뿐이다. 트럼프는 이민자, 무슬림, 여성에 대한 극우적 발언 때문에 ‘걸어다니는 헤드라인’으로 불릴 정도로 일거수일투족이 언론의 관심을 받는다. 그는 TV 리얼리티쇼를 11년간 진행한 감각으로 어떤 얘기가 대중의 말초적 본능을 자극할 것인지 잘 안다. 그가 공화당 주류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6개월째 1위 자리를 지키는 것은 사람들의 본능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트럼프가 미국 사회의 기득권에 제기하는 가장 큰 위협은 기껏해야 공화당의 대선 패배일 뿐 가진자들에게 위험한 존재는 결코 아니다.


반면 샌더스는 일반적으로 대중이 원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얘기를 의식적으로 경계한다. 그는 흑인 폭동이 일어났던 볼티모어 빈민가를 찾은 자리에서 이슬람국가(IS)나 테러 관련 질문에 답을 하지 않겠다고 말해 미국 언론의 입방아에 올랐다. 그는 테러 공포가 과도하게 부풀려져 얘기되고 있으며, 그럴수록 미국 사회가 직면한 본질적인 문제인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얘기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는 지난 40년간 직업정치인들이 진짜 중요한 문제인 0.1% 부자, 소득 불평등에 대해 제대로 얘기하지 않는 것이 미국 정치의 문제라고 비판해왔다.

‘사회주의자’를 표방하는 정치인이 지난여름 미국뿐만 아니라 한국에서까지 관심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오랫동안 유지해온 메시지의 일관성 때문이다. 그 일관성이 테러 국면에서는 득보다는 실이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샌더스는 자기 입장을 바꿀 생각이 없다. 샌더스가 혜성같이 나타난 것이 아니듯 갑자기 사라지지도 않을 것이다. 정당이 몇 년도 안돼 흩어졌다 다시 합쳐지고 이름을 바꾸는 일이 다반사인 정치 현실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한 정치인이 40년간 일관된 메시지를 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감이 오지 않을 뿐이다.


워싱턴 손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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