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북한 비핵화와 한반도 비핵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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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한반도 칼럼

[세상읽기]북한 비핵화와 한반도 비핵지대

by 경향글로벌칼럼 2018. 10. 16.

‘비핵화’라는 용어의 시원은 1957년 10월 유엔 연설에서 폴란드 외무장관 아담 라파츠키가 동독, 서독,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등 중부유럽의 비핵지대(화)를 담은 일명 ‘라파츠키 플랜’에서였다. 라파츠키 자신이 ‘비핵화(denuclearization)’ 용어를 사용한 것은 아니며, 대신에 1958년 초 소련 제1외무부상이 중부유럽의 ‘비핵화’를 소련이 지지한다는 루머를 일축하는 가운데 이 용어를 사용했다. 당시 캐나다 국무차관도 라파츠키 플랜이 좌초될 것을 우려하는 내용이 담긴 비밀 전문에서 ‘비핵화’를 썼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라파츠키가 ‘비핵화’ 단어를 촉발시킨 장본인이 된 셈이다.

 

‘비핵화’ 활자가 드러난 대표적 사례는 ‘봉쇄정책의 아버지’ ‘냉전의 설계자’로 불리는 미국의 외교관이자 역사학자 조지 케넌이 프린스턴대 명예교수로 재직하면서 뉴욕타임스 1981년 10월11일자에 기고한 글이었다. 기고문 제목이 ‘비핵화’였다. 당시 미국과 소련 간 치열하게 벌인 유럽 내 핵무기 경쟁을 두고 케넌이 기고문에서 언급한 비핵화는 특정국가 내 지상 기반의 핵무기만 제거하는 것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7일 방북 직후 청와대를 방문한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을 만나 악수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그러나 이는 ‘특정 지역 내에서 국가 간 조약 또는 협약에 의해 핵무기의 생산, 보유, 배치 및 실험 등이 포괄적으로 금지된 지역’을 의미하는 비핵지대(Nuclear Weapon Free Zone)와는 결이 다른 핵무기 제거였다. ‘비핵지대’가 역내 조약 당사국들에 핵보유국(미국·러시아·중국·영국·프랑스)이 핵무기 사용과 위협도 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소극적 안전보장’(Negative Security Assurance)을 제공하고 있음에 반해 ‘비핵화’는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처럼 조약이 아닌 정치적 선언이며 소극적 안전보장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인구가 집중된 지역을 최초로 비핵지대화한 1967년의 ‘중남미 핵무기 금지조약’의 애초 명칭도 ‘중남미 비핵화 조약’(Treaty for the Denuclearization of Latin America)이었다. 그러다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권을 주장한 브라질 ‘비핵화’의 의미가 불명확하다는 이유를 내세워 명칭 변경을 요구, 현재의 이름으로 확정됐다.

 

북한 역시 남한의 핵무기 도입과 명칭에 민감했다. 북한이 핵무기 반입에 반대 입장을 처음으로 표명한 때는 1956년 11월 최고인민회의 제1기 12차 회의의 ‘조선반도 핵무기 반입 반대 결정’을 통해서였다. 이는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이승만 대통령의 요구에 따라 전술핵을 남한에 배치(1958년 1월)하기도 전에 이루어진 공세적 압박전략의 일환이었다. 1976년 비동맹 정상회담에서도 ‘조선반도 비핵지대화’를 제기했다. 이후 김일성은 1986년 6월 ‘조선반도에서의 비핵지대, 평화지대를 창설할 데 대한 제안’을 발표하고, 같은 해 9월 ‘조선반도에서의 비핵·평화를 위한 평양국제회의’에 80여개 국가 대표들을 초청, 전 세계의 비핵화를 요구하는 성명을 내기도 했다. 핵무기 야망을 분식하기 위한 속임수였다. 그러면서 북한은 한반도에서 사실상 미국이 핵무기를 철거하고 반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를 가지고서 접근 및 통과하는 것도 허용하지 않는, 엄밀히 말해 한반도의 ‘비핵지대(화)’를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다.

 

남북한과 미국이 마침내 종점이 북한 비핵화인지 아니면 한반도 비핵지대인지 모호한 버스에 탑승하기로 결정했다. 지난 두 번의 남북정상회담과 미증유의 북·미 정상회담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하지만 종착지도 불분명하고, 짙은 안개(사찰, 검증 등)로 시야 확보도 제대로 되지 않은 여정이 평탄하지 않을 것이라는 게 대다수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남북한을 포함한 유관 당사국들의 속내가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마케팅과 선전이 다르듯, 비핵화와 비핵지대 역시 다른 개념이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관련국들은 비핵화와 비핵지대 중 택일을 하고, 동시에 선택한 것의 범위를 구체적으로 확정해야 한다. 그래야 핵무기가 없는 전경(全景)을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확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병철 | 평화협력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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