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두율 칼럼]전쟁과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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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한반도 칼럼

[송두율 칼럼]전쟁과 평화

by 경향글로벌칼럼 2018. 1. 16.

인류의 역사는 크고 작은 위험과 재앙으로 점철된 기록자체라고 볼 수 있다. 평안하고 안전한 삶을 누리려는 본래적인 욕망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늘 시달려 왔는데 그중에도 전쟁은 인간 스스로가 초래한 가장 참혹한 재난이었다. 이 시각에도 이러한 재난은 시리아를 비롯한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고 그 끝도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최근에는 외국언론에 한반도의 전쟁위기를 다루는 기사나 논평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이런 까닭에 평소 한반도 문제에 관심을 가진 동료나 친지들도 한반도에 정말 전쟁이 재발할 가능성이 있는지에 대해서 나에게 묻는다. 어떻든 걱정스러운 상황이기에 나는 국내와 해외언론의 동향을 더 열심히 챙겨 보게 된다. 한반도의 전쟁위기에 대해 국내와 해외의 일반적 평가나 반응이 서로 조금 엇갈리고 있는데, 해외에서는 국내보다 위기상황을 더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전쟁위험과는 거리가 먼 서울시민의 일상적인 생활과 반대로 전쟁위험이 크다고 보는 서방 측 언론은 위험에 대한 서로 다른 판단기준을 보여주고 있다. 전자는 호랑이가 아직 우리 안에 갇혀있는 것으로 보고 있는데, 후자는 호랑이가 이미 우리에서 빠져나와 마을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한반도에서 전쟁위험이 아예 없다거나 아니면 작다거나 또는 상당히 크다고 여기는 판단기준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위험을 사회심리학에서는 우선 사회성원 사이에 퍼진 공포감, 불확실성과 무지에 근거한 집단적 반응으로 본다. 구성주의적 갈등이론도 권위를 행사하는 언론, 학계, 정치와 경제엘리트 등이 어떤 사태를 위험으로 규정하고 소통을 통해 이를 정치화하는 행위에 주목한다. 모두 다 위험의 주관성을 강조한다. 가령 심장병환자의 위중 정도나 기업경영에 나타나는 위험 정도를 상당히 객관화시켜 볼 수 있는 것과 많은 차이가 있다.

 

위험(risk)은 큰 암석이 굴러떨어질 수도 있는 바닷가에 있는 절벽(rhiza) 밑을 항해하는 배의 위기적 상황을 묘사하는 고대그리스어로부터 유래하고, 위험(危險)의 위(危)자도 원래 아슬아슬한 절벽 위에 서 있는 사람과 그 밑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사람을 형상화하였다. 두 단어 모두 완결되지 못한, 극도로 불안정한 정황을 묘사하고 있다. 그렇게 보면 호랑이가 우리 속에 갇혀 있다는 생각이나 호랑이가 이미 밖에 나와 어슬렁거리고 있다는 판단도 위험이 지니고 있는 미완의 긴장성을 지나치고 있다. 위험을 단순히 안전에 대한 반대개념으로 여기고 있기에 이의 부재에만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험을 우리 삶의 불가피한 요소라고 본다면 차라리 호랑이를 가두어 둔 우리가 정말 튼튼한지에 대하여 먼저 관심을 돌려야 한다. 그럴 때 평화학자 요한 갈퉁의 주장처럼 단순히 전쟁이 없다는 의미로서 이해되는 ‘부정적인’ 평화는 물론 온전한 평화체제를 적극적으로 확립하는 ‘긍정적인’ 평화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된다.

 

우리는 ‘위기가 곧 기회다’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지금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치적인 난기류는 자기이해에 따라 과대평가될 수도 있고, 또 과소평가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일어나지 않은 전쟁이었는데 앞으로도 그럴 것으로 관습화된 믿음과 안이한 태도를 가지고는 위에 지적한 긍정적인 평화는커녕, 부정적인 평화도 기대될 수 없다. “너희들이 삶을 걸지 않으면 너희들의 삶은 얻어질 수 없다”는 독일 극작가 프리드리히 실러의 <발렌슈타인>의 유명한 대사도 위험이 오히려 새로운 자유를 촉발한다는 역설을 지적하고 있다. 일상 속에 안주하려는 무기력하고 지루한 연속을 일시에 혁파하고 부정까지도 포괄할 수 있는 강한 긍정이 위기를 기회로 전화시키는 힘이다. 이런 까닭에 위험은 모험이나 결단 또는 운명적인 기회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올해 우리는 한반도에 서로 다른 체제를 가진 두 국가를 세운 지 70년을 맞는다. 냉전시대의 최초의 혈전이 남긴 비극이었던 한국전쟁을 겪은 지도 이미 65년이 지났건만 우리는 여전히 ‘휴전체제’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자기최면에 걸린 안전과 사이비 평화 속에서 살고 있다. 정치사회적인 위기에 직면해서는 4·19의거, 5월 광주항쟁, 6월항쟁 그리고 작년에는 ‘촛불혁명’이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중요한 계기들이 긍적적인 평화는 물론 부정적인 평화로도 이어지지 못했다. 두 번에 걸쳐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었고, 크고 작은 남북의 만남도 있었지만 지속가능한 평화체제를 창출하지 못했다. 이는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분단체제를 효과적으로 관리해 온 한반도 안팎의 세력이 아주 강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북핵 문제가 촉발시킨 위험은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현상유지에 충격을 주고 새로운 변화를 도출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쇄빙선이 얼음에 갇혀 더 이상 항해를 지속할 수 없을 때는 선체 안에 적재한 많은 물을 좌우로 강하게 흔들어 생길 때 얻어진 힘으로 얼음을 깨고 전진한다. 지금의 위기는 오히려 현상유지라는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충격을 주고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도 보여주고 있다. 이런 까닭에 위험에 관해 지금까지 타성에 젖은 우리의 생각과 행동에도 당연히 변화가 있어야 한다.

 

개구리를 뜨거운 물 속에 집어넣으면 개구리는 죽을힘을 다해 탈출을 시도하지만, 이를 미지근한 물 속에 놓고 점차적으로 수온을 높이면 개구리는 그 속에서 편안하게 죽는다. 니체의 ‘자라투스트라’에게는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길목에 있는 성문의 현판에 쓰여진 단어 ‘순간’은 지루한 시간을 이어온 고리를 단번에 끊는 화두였다. 한반도의 위험이 증폭되는 요즘이 바로 그러한 순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 사회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수 있는 사회적 동력은 결코 소진되지 않았다. 촛불혁명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적폐청산이나 민생과 개헌 문제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그렇게 오랫동안 우리의 삶을 옥죄어 왔던 근본 문제를 잊지 말아야 한다. 평화체제의 결손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촛불혁명이 한반도의 평화를 지키는 힘있는 계기로 승화되는 소식을 그래서 더욱더 기대하게 된다.

 

<송두율 | 전 독일 뮌스터대학교 사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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