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대북 제재 해결 매뉴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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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한반도 칼럼

[시론]대북 제재 해결 매뉴얼

by 경향글로벌칼럼 2018. 10. 15.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모르겠지만 한국에는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라는 거친 속담이 있다. 미국 대통령에게 이명박 정부의 ‘5·24 대북 제재’가 그렇다. 살릴 수 없다. 법적으로 평가하면, 법적 구속력이 없다. 애시당초 법률이 아니었다. 정치적으로도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여 역사적인 ‘판문점선언’과 ‘평양 공동선언’을 제창함으로써 생명을 다했다. ‘남북 교역 중단’과 ‘신규 투자 불허’를 내용으로 하는 5·24는 새로운 남북 선언들과 양립할 수 없다.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면서, 과거로 사라진 밤이다. 해제 절차가 필요하지 않다.

 

5·24를 둘러싼 최근의 논란을 보면서, 대북 제재에서 법치주의가 시급함을 확인한다. 애초 이명박 정부의 5·24는 초헌법적이었다. 헌법에서 정한 긴급명령권 발동을 전혀 지키지 않았다. 남북교류협력법도 지키지 않았다. 법치주의자라면 이 점을 먼저 지적해야 한다. 그러나 이미 죽은 5·24를 놓고 ‘해제’니 ‘승인’이니 말을 하는 현실이다. 법치의 취약한 곳을 본다. 법치는 사람의 몸과 같이 하나로 통합된 유기체와 같다. 한 곳이라도 바로 서지 못하면 전체가 탈이 난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7일 평양을 방문한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뒷줄 가운데)과 백화원 영빈관에서 오찬을 하고 있다. 김영철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앞쪽 왼쪽)과 스티브 비건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오른쪽)도 배석했다. CBS 카일리 애트우드 기자 트위터

 

이미 죽은 5·24를 놓고 논란을 벌일 만큼 현실은 한가하지 않다. 대북 제재의 불확실성을 시급하게 해결해야 한다. 미국의 대북 제재에서 드러난 불확실성과 과잉이 문재인 대통령의 평화 정책을 삼켜 버리는 일이 없도록 대북 제재 해결 매뉴얼이 필요하다.

 

남북 교류협력의 일선 현장은 대북 제재의 불확실성과 과잉 적용으로 인하여 매우 혼란스럽다. 문 대통령의 평양 공동선언에서의 남북 경협 자체가 제재로 인하여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말조차 있다. 미국의 소리(VOA) 방송이 대표적이다. 북한 방문에 꼭 필요한 여행경비도 제재 대상인지 논란이 될 정도이다. 특히 은행업은 자칫 미국의 대북 제재 위반이 될지도 모른다는 초긴장 상태에 있다.

 

제재의 불확실성과 과잉 적용은 미국 독자 제재에서 더욱 심각하다. 미국의 제재에서는 제재 대상인지, 아니면 제재 대상이 아닌 예외사항인지, 대상이지만 면제해 줄 수 있는 사항인지 거미줄처럼 복잡하다. 제재를 집행하는 미국 정부의 재량권도 매우 넓다.

 

미국법은 본디 미국 밖의 한국인에게는 관할이 미치지 않는다. 미국 법에서 총을 소유하는 것이 가능하니 나도 총을 갖게 해 달라고 경찰서를 찾는 한국인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미국의 대북 제재는 금융기관 제재라는 통로를 통해 그 불확실성을 한국에 증폭시킨다.

 

은행은 달러 국제결제망 속에서 영업을 하기에 미국계 은행에 결제용 달러 계좌를 갖고 있다. 미국계 은행에 있는 계좌에는 미국 제재가 미친다. 미국 제재법은 고의로 북한과 관련된 ‘중대한 거래’에 협력한 은행들에 대해서는 국적을 불문하고 해당 은행이 미국계 은행에 예치한 달러 계좌를 압류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한국 은행도 적용 대상이다. 만일 한국의 은행이 미국계 은행에 예치한 달러 계좌가 동결되면 외환 거래가 불가능한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은행의 초긴장이 이해된다.

 

법치가 가장 필요한 곳이 안 보인다. 제재의 불확실성이 문 대통령의 선언 이행에 장애가 되지 않도록 법치로 대응해야 한다. 유엔·미국의 대북 제재의 공식적 해설을 법치가 담당해야 한다. 유엔·미국의 대북 제재에 대한 통일적 적용 기준을 한국이 먼저 마련해야 한다. 유엔과 미국이 협의하여 한국의 은행, 기업, 개인에게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가장 대표적으로 한국의 은행들이 미국 제재를 적용받는 ‘중대한 거래’가 금액 기준으로 몇 달러부터인지 미국과 조속히 협의해서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

 

‘관광’은 유엔의 대북 제재 대상이 아니다. 북한 여행을 금지하는 미국의 대북 제재는 한국인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한국인 관광객이 북한에 머무는 숙박비와 관광가이드 비용을 북한 사람에게 지급한다고 해서, 북한 사람에게 ‘대량 현금’을 주는 것에 해당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유엔과 미국의 제재에서도 가능한 금강산 관광 방식을 만들 수 있다.

 

나아가 한국의 법치를 국제적으로도 확장해야 한다. 북한이 핵실험을 동결하고, 핵실험 시설을 해체하는 것과 조응하여 유엔의 대북 제재를 완화하고 더 간명하게 해야 한다. 특히 북한에 일절 외국 은행 지점을 설치할 수 없게 한 조항을 삭제해야 한다. 북한의 섬유제품 수출을 금지하는 제재도 해제해야 한다. 북한 경제가 국제경제 속에서 돌아갈 수 있게 해야 한다.

 

대북 제재의 불확실성을 해소하여 문 대통령의 평화 선언을 뒷받침해야 한다. 그 핵심은 미국의 대북 독자 제재에 대한 명확한 해석과 적용 기준을 만드는 것이다. 대북 제재 해설 매뉴얼이 필요하다. 이것을 가지고 미국 정부와 지속적으로 협의해서, 우리 기업과 은행에 신뢰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비핵화는 선언만으로 오지 않는다. 법치가 함께 필요하다.

 

<송기호 |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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