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중국이 ‘패싱’을 피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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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한반도 칼럼

[시론]중국이 ‘패싱’을 피하려면

by 경향글로벌칼럼 2018. 6. 7.

지난 5월27일 문재인 대통령이 북·미 정상회담 이후 남·북·미 3자 협상을 통해 종전선언을 하겠다는 방안을 밝힌 이후, 중국이 한반도 문제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차이나 패싱’ 논란이 재점화되었다. 이 논란을 불식시키기 위해 중국은 정전협정의 서명국으로 역할을 수행하겠다는 의지를 계속 강조하는 한편 오는 8일 칭다오에서 개최되는 상하이협력기구(SCO) 정상회의에서 북·중·러 정상회담을 추진하고 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원하는 남·북·미·중 4자 협상이 즉각 실현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이 시진핑 주석을 두 번째 만난 이후 태도가 바뀌었다”고 지적하면서 북·미 정상회담의 연기를 선언했던 일 이후, 남북 모두 중국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그렇지만 한반도 문제 해결 과정에 중국을 장기간 배제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북·미가 비핵화에 합의한 후 경제 지원 방안이 논의되기 시작하면, 중국이 미국보다 더 많은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를 제외한다면, 북한 경제의 재건에 필요한 재원을 조달하는 것은 물론 개혁·개방정책의 경험을 전수하는 데 중국보다 더 적극적인 국가는 없다.

 

문재인 정부가 구상하고 있는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에는 막대한 재원이 필요하다. 한국건설산업연구원에 따르면, 낙후된 인프라를 개선하는 데만 향후 10년간 270조원 이상이 소요될 것으로 추정된다. 증세를 하거나 국채를 발행하지 않는 이상, 현재 우리 정부가 당장 활용할 수 있는 재원은 남북협력기금(1조6000억원)과 공적개발원조(3조482억원)밖에 없다. 또한 우리 민간 기업이 정치적 위험이 큰 대규모 투자를 당장 추진할 가능성도 아주 희박하다.

 

미국이 핵무기 폐기 대가로 북한에 제공할 공식적인 경제지원은 상당히 제한적일 것이다. 정부 차원의 공식적 자금 지원은 군사동맹국에조차 더 많은 방위비 분담을 요구해온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 정책기조에 부합하지 않는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대규모 개발원조보다는 제재 완화를 통한 미국 민간 자본의 투자 확대를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있다. 일본은 식민지 지배 배상금으로 약 200억달러(약 21조4000억원)를 지불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베 총리가 국교정상화의 전제조건으로 요구하는 일본인 납북자 문제의 해결이 선행되기 전에 배상금이 지급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

 

세계은행, 아시아개발은행(ADB),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과 같은 다자개발은행(MDB)도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북한이 세계은행과 ADB의 회원국이 아니기 때문에 가입 전에 공식적인 지원을 받는 데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또한 이 기구들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국제통화기금(IMF)의 회원국이 되어야 하는데, 최대 지분을 가진 미국이 적극적으로 도와주더라도 최소 2~3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대규모 자금을 당장 지원할 수 있는 국가는 중국밖에 없다. 중국은 5월 북·중 정상회담 직후 북한 노동당 핵심 간부로 구성된 경제투자사절단을 초청해 경제협력방안을 논의한 바 있다. 여기에서 중국이 주의해야 할 점은 유엔의 대북 경제제재에 위배되지 않게 협력의 속도와 범위를 조절하는 것이다. 만약 중국이 보편적 국제규범보다 북·중 혈맹관계의 특수성을 강조한다면, 중국의 역할에 대한 논란이 다시 불거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중국이 주도적으로 설립한 AIIB는 매력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AIIB 정관에 따르면, 총회에서 최대다수결(3분의 2 이상 회원국 총회 참가에 4분의 3 이상 투표권 찬성)을 확보하면 비회원국에 투자를 할 수 있다. 중국·러시아·인도·한국 등 주요 회원국이 지지한다면, 북한에 대한 지원은 신속하게 이뤄질 수 있다. 북한이 당장 필요로 하는 철도·도로·항만 개발이 AIIB의 주력 사업이라는 점도 유리한 점이다. AIIB를 통한 대북 경제지원은 시진핑 정부의 일대일로 구상과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을 연결시키는 고리가 될 수 있다. 이 사업을 통해 환서해경제벨트와 환동해경제벨트가 중국·몽골·러시아 경제회랑과 연계된다면, 한국·북한·중국·러시아·몽골을 포괄하는 새로운 동북아경제권이 형성될 것이다.

 

중국이 국제규범을 존중하면서 북한 경제개혁과 동북아경제권 형성에 건설적인 역할을 확대한다면, ‘차이나 패싱’ 논란은 저절로 수그러들 것이다. 따라서 지금 중국은 당장 실현되기 어려운 남·북·미·중 4자 회담을 주장하기보다는 종전선언 이후 평화체제 구축에 어떻게 기여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효성 있는 방안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이왕휘 | 아주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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