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질 태클과 무책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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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김진우의 도쿄 리포트

악질 태클과 무책임의 역사

by 경향글로벌칼럼 2018. 5. 30.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을 둘러싼 의혹과 불상사가 끊이지 않는 일본에서 최근 연일 언론을 장식하고 있는 사건이 있다. 대학 미식축구 라이벌전의 ‘악질 태클’ 파문이다. 사건은 지난 6일 미식축구 명문인 니혼(日本)대와 간세가쿠인(關西學院)대의 라이벌전에서 일어났다. 니혼대 수비수가 볼과 상관없는 곳에서 무방비 상태인 간세가쿠인대 쿼터백에게 백태클을 해 전치 3주의 부상을 입힌 것이다.

 

여론의 비난이 거세지자 해당 니혼대 선수는 지난 22일 사죄 기자회견을 열고 감독과 코치가 ‘악질 태클’을 하라고 사실상 지시했다고 밝혔다. 이 선수는 “의욕이 부족하다고 연습에서 제외됐다가 코치로부터 ‘상대팀 쿼터백을 첫 플레이에서 부숴버리면 (경기에) 내보내겠다고 감독이 얘기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전했다. 그는 결국 감독에게 “상대팀 쿼터백을 부수겠다. 써달라”고 말했고, 감독은 “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했다고 밝혔다.

 

그러자 해당 감독과 코치가 다음날 기자회견을 열어 “지시는 없었다”고 부인했다. 또 “‘부숴라’는 미식축구부가 자주 사용하는 표현으로 부상을 입히라는 뜻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니혼대도 같은 내용의 답변서를 간세가쿠인대에 보냈다.

 

하지만 간세가쿠인대 측은 “답변서에 모순이 많다”면서 수사기관 등에 의한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전문가들도 해당 수비수가 경기를 계속했고, 감독의 질책이나 후속 조치가 없었다는 점 등을 들어 코치진이 사실상 ‘악질 태클’을 유도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사건 추이는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이번 사건으로 치부를 드러낸 대학 스포츠계가 일본 사회의 축소판에 다름 아니라는 지적이 나온다. 적지 않은 이들이 직장이나 학교에서 이와 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문예평론가 사이토 미나코(齊藤美奈子)는 도쿄신문 칼럼에서 이번 사건이 ①감독이 전체적인 방향을 지시 ②코치가 ‘상대방 쿼터백을 부숴라’ 등 구체적 지시 ③ 다른 선택지가 없이 내몰린 선수가 ‘부술 테니 써달라’고 자청하는 구조라고 분석하면서 과거 일본 군대와 닮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일본 사회에는 지금도 일본 군대의 명령 계통과 역할 분담으로 움직이고 있는 곳이 많다고 했다.

 

실제 2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일본군은 사라졌지만, 일본군의 조직 원리나 문화는 기업이나 학교 등에 그대로 이어졌다는 분석이 있다. 2015년 도시바의 대규모 분식회계 사태가 대표적 사례다. 금융위기가 세계를 강타하던 2008년 도시바의 사장은 임원회의에서 120억엔을 확보하라고 지시했다. 이는 분식회계를 하라는 말과 똑같았다. 무리한 지시가 떨어져도 어떻게든 완수해야 하는 것이 도시바의 조직문화였다.

 

아베 총리가 관여한 의혹을 받고 있는 ‘사학스캔들’도 마찬가지다. 총리의 의도를 공무원들이 손타쿠(忖度·윗사람의 뜻을 헤아려 알아서 행동)한다. 문제가 생기면 현장에 책임을 떠넘기고 자신은 “명령한 적이 없다”고 하면 된다.

 

한 일본 언론인은 이번 사건에서 전후 일본 사회의 ‘무책임의 구조’를 본다고 했다. 일본은 주변국에 심대한 고통을 안겼던 전쟁 책임 문제를 제대로 마주보지 않았다. 기업으로 치면 회장이라 할 일왕부터 책임을 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퇴위도 하지 않았고, 전쟁 책임에 대해 이렇다 할 말 한마디 없었다.

 

역사학자 나카무라 마사노리(中村政則)는 <일본 전후사>에서 이런 일왕의 태도가 “전후 일본인의 정신사에 헤아릴 수 없는 마이너스 영향을 끼쳤다”면서 “전쟁 책임의식을 희박하게 했을 뿐 아니라 지도자의 정치적 책임, 도의적 책임을 지는 방식에 맺고 끊는 것이 없어졌다”고 지적했다. ‘악질 태클’ 사건에 일본 사회의 이런 무책임 구조를 대입하는 것이 이 언론인만의 과대 해석은 아닐 것이다.

 

<도쿄 | 김진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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