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지하 만리장성’ 대 ‘지하 펜타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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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

[여적]‘지하 만리장성’ 대 ‘지하 펜타곤’

by 경향글로벌칼럼 2018. 1. 9.

당초 핵무기는 보유만 하면 적에 대한 억지력이 확보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선제공격을 당한 쪽이 무조건 지는 게임이었다. 그러나 핵무기와 미사일 기술이 발전하면서 이런 개념이 깨졌다. 일단 상대의 공격을 견뎌낸 후 응징 보복할 수 있느냐가 관건으로 등장했다. 중국의 핵전략인‘장성(長城)전략’도 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핵 공격 능력은 최소화한 채 1차 핵공격을 감내하고 나서 2차 반격에 집중하는 것이다. 여기서 지휘부와 핵무기를 쏘아올릴 미사일을 1차 공격에서 온전히 보존하는 게 필수가 되었다.

 

핵 전쟁 시 미국 지휘부가 머물러 ‘지하 펜타곤’으로 불리는 미 펜실베이니아주 레이븐록 지하 벙커의 입구

 

지하 벙커가 등장한 이유다. 최근 유사시 중국의 지도부가 대피하는 지하 핵시설이 공개됐다. 지하 벙커는 지도부들이 집단 거주하는 베이징 중난하이에서 북서쪽으로 20㎞ 떨어진 시산(西山) 국립공원 내 지하 2㎞ 깊이에 있다. 이 벙커의 규모가 어마어마해서 화제가 됐다. 자그마치 100만명 이상에게 식수를 공급할 수 있다. 왠만한 도시 하나가 벙커로 들어가는 것이다. 중국은 지난해 5월 소림사가 있는 쑹산 일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설과 반격훈련 장면을 공개한 바 있다. 당시 중국 CCTV는 중국군이 이곳에서 한달동안 밀폐된 채 2차 반격 훈련을 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곳 역시 지하 1㎞ 깊이에 총 길이가 5000여㎞에 달해 ‘지하 만리장성’으로 불린다. 중국의 핵전략 중 방어와 공격을 수행하는 두 핵심시설이 공개된 셈이다.

세계 최강의 핵무기 국가인 미국도 비슷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 핵전쟁에 대비해 수도인 워싱턴 DC인 펜실베이니아주 레이븐록산과 버지니아주 웨더산 지하에 지휘벙커를, 콜로라도주 샤이엔산에 미사일 시설을 두고 있다.‘지하 펜타곤’으로 불리는 레이븐록 벙커는 워싱턴 DC 북서쪽에 있는 대통령 별장 캠프 데이비드에 인접해 있다. 백악관에서 캠프 데이비드까지는 약 100㎞, 웨더 벙커까지는 70여㎞ 떨어져 있는데 유사시 대통령은 이 둘 중 한 곳으로 가 전쟁을 지휘하게 된다. 지난 2001년 9·11 공격이 벌어졌을 때 딕 체니 부통령은 백악관 벙커에서 상황을 보다 하원의장과 장관들에게 헬기 편으로 웨더 벙커로 가라고 지시했다. 웨더 벙커를 전쟁 지휘소로 선택한 것이다. (당시 조지 부시 대통령은 플로리다에 있었다.) 만약 당시 부시 대통령이나 체니 부통령이 캠프 데이비드에 있었다면 레이븐록으로 갔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미국에서 핵 벙커 설치를 주도하는 것은 기업과 민간인들이다. 핵 전쟁이 나면 정부가 주요 인사와 필수 인원만 벙커로 데려가 보호하기 때문에 돈 많은 사람들이 앞다퉈 개인 벙커를 마련하고 있다. 할리우드 스타 톰 크루즈와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 등 저명인사들까지 저택 지하에 벙커를 설치하고 있다. 최근 북한의 핵 위협이 고조되면서 한 업체는 매출액이 5배까지 늘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도 민간 벙커 설치가 유행했다.

 

레이븐록 벙커의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필수 기능만 갖춘 것에서 호화판까지 벙커도 각양각색이다. 창사 36년만에 최고 매출을 기록한 LA의‘아틀라스 서바이벌 셸터스’는 2만(약 2200만원)∼16만5천달러(1억8천만원)짜리 벙커를 제작하고 있다. 태양광 패널로 전기를 확보하고, 저장고에 음식과 물을 챙겨놔 6개월에서 1년간 생활이 가능하다. 캔자스주에는 미사일 격납고를 개조한 콘도형 벙커가 있는데, 지하 15층에 각 층이 50평 넓이로 침실과 거실, 주방, 화장실 등을 갖추고 있다. 헬스장은 물론 영화관과 수영장, 스파에 심지어 무기고까지 있다. 채소를 가꿀 비닐하우스도 있어 75명 전체 입주민이 5년 남짓 생활할 수 있다. 한 개 층 가격이 400만달러(44억원)다. 최근엔 5성급 호텔과 맞먹는 초호화판 벙커까지 나왔다. 한 채 분양가가 1750만달러(약 190억원)에 이른다고 하니 어떤 시설을 갖췄는지 상상하기도 쉽지 않다.

 

미 조지아주에서 분양되고 있는 5성 호텔급 초호화 지하벙커. 한 채 분양가가 190억원으로 제시됐다


미·소 냉전이 종식된 후 핵무기 무용론이 득세했지만, 오래 가지는 못했다. 소련 대신 중국이 부상해 미·중 갈등이 고조되고, 북한의 핵개발이 겹치면서 다시 핵 대결 양상으로 흐르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김정은을 향해 자기 핵 단추가 더 크다고 자랑할 즈음 중국이 대규모 벙커를 공개하자 냉전시대로 되돌아간 느낌이다. 유사시 벙커에 들어갈 중국인 100만명과 미국의 부유한 시민 수십만명은 전체 인구의 0.1%에 해당한다. 이들만 벙커에서 생존한다면 핵 전쟁에서 이겨본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중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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