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역사는 정치적 합의로 지워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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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유신모의 외교 포커스

위안부 역사는 정치적 합의로 지워지지 않는다

by 경향글로벌칼럼 2016. 9. 1.

일본 정부가 31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지원을 위해 설립된 ‘화해·치유재단’에 10억엔을 송금함에 따라 지난해 12월28일 한·일 정부 간 위안부 합의는 사실상 이행됐다. 앞으로 위안부 피해자 문제가 양국 정부 간 현안으로 불거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일본의 10억엔 송금 완료는 그동안 양국관계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현안이었던 위안부 피해자 문제가 공식적으로 종료됨을 의미한다. 1991년 8월14일 위안부 피해자였던 고(故) 김학순 할머니가 자신의 경험을 처음으로 공개 증언해 이 문제가 세상에 알려진 지 정확히 25년 만이다.

 

하지만 위안부 합의 이전과 이후를 비교해 봐도 일본은 달라진 게 없다. 일본은 위안부 문제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이미 해결된 사안이며 10억엔은 배상금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은 여전히 인정하지 않고 있고 법적 책임이 없다는 입장도 불변이다. 피해자들에 대한 진정한 사죄는커녕 미안한 기색도 없다. 지난해 위안부 문제 한·일 합의 직후 “잃은 것은 10억엔뿐”이라고 말했던 일본은 지금 “10억엔 송금으로 이제 일본이 해야 할 의무는 다했다”고 말한다. 일본은 앞으로도 여전히 위안부 문제에 대한 ‘망발’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반면 한국에는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합의에 따라 위안부 문제는 ‘최종적·불가역적으로’ 해결됐기 때문에 정부는 이에 관한 문제제기를 할 수 없다. 국제사회에서 위안부 문제로 일본을 비판하는 것도 자제해야 한다. 게다가 일본은 앞으로 틈만 나면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있는 ‘평화의 소녀상’을 이전하라고 한국 정부를 닦달할 것이다.

 

정부는 10억엔에 ‘배상금의 성격’이 포함된 것이라고 설명해왔다. 그렇다면 정부에 묻고 싶은 게 있다. 이제 정부는 일본이 위안부 문제에 대한 법적 배상의 의무를 다한 것으로 간주할 텐가. 2011년 헌법재판소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정부가 노력하지 않고 있는 부작위(不作爲)는 위헌’이라고 결정한 효력도 이젠 소멸된 것으로 봐야 하는가.  외교부에 이에 대한 공식 답변을 요청한 지 열흘이 지났지만 답을 받지 못했다.

 

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대한 법적 책임을 스스로 인정하도록 만드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해방 이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부터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현대사를 지금 와서 모두 뒤집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일본이 합의문에 잉크도 마르기 전에 위안부 강제동원의 근거가 없다고 부정하고, 법적 배상 책임은 원래부터 없었다고 하고, 10억엔 줬으니 이젠 이 문제를 더 이상 꺼내지 말고 소녀상이나 치우라고 큰소리칠 수 있도록 면죄부를 준 합의를 받아들일 수는 없다.

 

이제 남은 것은 화해·치유재단이 10억엔을 피해자들에게 나눠주는 일뿐이다. 정부는 이미 생존자에게 1억원, 사망자 유족들에게 2000만원 규모의 현금을 지급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위안부 피해자가 245명이며 이 중 생존자가 40명이니 이들에게 돈을 나눠주면 기금 대부분이 소진되고 재단은 조만간 문을 닫아야 한다.

 

결국 이 재단은 배상금의 성격을 희석시키기 위해 일본 정부 대신 피해자들에게 돈을 전달하는 창구 역할을 하고 사라지는 ‘떴다방 돈세탁 재단’이나 마찬가지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뀐 듯한 이 같은 어이없는 합의는 ‘박근혜 외교’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잘 보여준다. 한·일 위안부 합의는 박근혜 외교의 철저한 실패가 낳은 부산물이다. 박 대통령은 취임 초기부터 한·일관계를 전략적으로 다루지 않고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일본을 상대하지 않겠다는 식의 강경한 대일 자세를 보이며 스스로 퇴로를 차단했다.

 

하지만 미국이 일본을 앞세우고 한국을 동참시켜 중국을 견제하려는 ‘아시아 재균형 정책’을 펴는 마당에 이 같은 대일 강경기조는 애초부터 오래 유지될 수 없는 자충수였다. 결국 궁지에 몰린 박 대통령은 일본의 요구가 모두 관철된 합의문에 동의해주고 위안부 문제에서 벗어났다. 그 부담은 고스란히 위안부 피해자와 국민들에게 돌아왔다.

 

위안부 문제는 이렇게 한·일 정부 간 현안의 목록에서 지워졌다. 하지만 역사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위안부 문제와 같은 반인도주의적 범죄는 인류보편의 가치를 담은 국제인권법에 의해 다뤄지기 때문에 해당 정부 간 합의로 종료될 수 없다.

 

위안부 문제 해결은 진실을 규명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사죄와 용서, 화해가 이어져야 비로소 종료됐다고 말할 수 있다. 정부는 그 작업을 포기했다. 25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다시 시민사회의 몫이 됐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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