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근 칼럼]트럼프에 낙담한 미국 시민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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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 가다 /미국 대선 일기

[이대근 칼럼]트럼프에 낙담한 미국 시민에게

by 경향글로벌칼럼 2016. 11. 16.

우리가 미국 시민인 당신을 위로할 처지가 아닌 줄은 압니다. 그러나 서로 슬픔과 고통을 나누면 한결 나아질 거라고 믿습니다. 당신은 평생 여자의 꽁무니나 쫓고 혐오발언을 일삼던 자가 대통령 된다는 사실에 한숨짓습니다. 로비스트·가족으로 인수위원회를 구성한 트럼프를 보며 다시 절망하는 당신. 그런 당신에게 한국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위안이 되었으면 합니다.

 

트럼프는 성인입니다. 수세에 몰린다고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가업을 일궜다’며 동정심을 자극하지 않았습니다. 손자를 봤을 나이인데도 위기마다 고아라는 걸 내세우거나 “외롭게 살았다”는 어리광으로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키지도 않습니다. 최고 권력을 맘껏 누리면서도 누군가의 돌봄 없이는 국정을 이끌지 못할 만큼 미성숙하지도 않고, 사람과 마주하기를 꺼리는 아이처럼 낯가림이 심하지도 않습니다. 아직도 당신의 가슴이 진정되지 않는다면, 우리 한국인을 떠올려 보세요.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걸 느낄 수 있을 겁니다.

 

트럼프타워 앞에서 반트럼프 시위대와 경찰이 대치하고 있다. 뉴욕 _ AFP연합뉴스

 

당신은 트럼프의 아들·딸·사위가 공직을 맡는 걸 싫어하겠지만, 그들의 지위에 합당한 책임은 물을 수 있습니다. 그들의 활동은 일상적으로 평가받고 감시받을 테니까요. 적어도 박근혜처럼 하지는 않을 겁니다. 박근혜가 어떻게 했느냐고요? 가족을 감시한다며 청와대 특별감찰관제를 도입했죠. 그래서 우리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려 있는 동안 ‘또 다른 가족’이 감시망 밖에서 활개 칠 수 있게 마당을 펼쳐주었습니다.

 

트럼프가 인종·여성차별주의자이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분노한 노동자를 대변하기도 했죠. 하지만 박근혜가 대변한 건 죽은 박정희·최태민입니다. 산 사람 중에선 딱 한 명 있습니다. 최순실. 이게 4년간 발각되지 않고 지속될 수 있었던 건 바로 박근혜의 강점, 잘 속이고 잘 감추는 능력 덕입니다. 다른 목적을 위해서 눈 깜짝 안 하고 말하는 솜씨를 트럼프는 절대 따라 할 수 없을 것 같군요. 트럼프의 흠은 너무 솔직하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당신이 트럼프 대통령 치하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대략 짐작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물론 그가 자신의 공약대로 하겠다고 말함으로써 불안을 부추기고, 말한 대로 안 하겠다고 함으로써 혼란을 조성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조정기를 거치면 줄기가 잡히겠지요. 요즘 취임도 하지 않은 트럼프가 벌써 공약을 현실에 맞게 수정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군요. 자고로 짖는 개는 물지 않습니다. 설사 물려 해도 짖는 소리는 미리 대처할 수 있는 시간을 줍니다. 다행히 미국에는 제 역할을 하는 감시견이 많습니다.

 

미국 주류 언론은 한국 주류 언론처럼 레임덕이 없는 한 실정을 눈감아주는 비겁한 일을 하지 않습니다. FBI 같은 보안기구도 권력에 종속된 한국의 검찰·국정원 같지는 않습니다. 부를 독차지하면서도 감옥을 들락거리는 바람에 돈 뜯기 쉬운 재벌 총수라는 독특한 직업도 당신 나라에는 없습니다. 먹이가 없으니 박근혜·최순실 같은 사냥꾼도 없겠지요. 공화당도 대통령을 무조건 추종하는 새누리당 같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와는 달리 당신에게는 트럼프를 달래거나 바로잡거나 피할 기회가 있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4년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깜깜했습니다. 재벌 총수를 독대해 강압적으로 돈을 모으는 전두환·노태우 수법을 쓸 줄 우리가 몰랐던 한 가지 이유는, 그것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총리, 장관, 참모들이 나랏일을 알아서 잘 챙기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이제야 드러났지만 그 집단은 명목상의 지위만 가진 종이 정부, 일하는 척만 하는 은폐용 정부였습니다. 대통령 주치의조차 진짜를 따로 둘 만큼 그들은 빈틈없이 이중정부를 운영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동안 종이 정부에 얼마나 묻고 따졌는지 아십니까? 그럼에도 하나도 고쳐지지 않은 이유가 뭘까 얼마나 궁금했는지 아십니까? 알고 당하는 것과 모르고 당하는 것은 다릅니다. 개가 짖지도 않고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나 발을 물어뜯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기분이 무척 더럽죠.

 

여기 웬만해서는 짖지 않는 개들이 사는 조용한 동네가 있습니다. 도둑 없는 동네인 줄 알고 사람들이 경계심 풀고 대문 열어 놓고 삽니다. 그사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는 도적이 동네를 다 털어갑니다. 뒤늦게 온 동네 개들이 짖습니다. 보통 개는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따라 짖기도 하는데 따라 짖지도 못하고 끙끙대는 강아지 한 마리가 있군요. 새누리라고 합니다. 자, 이런 상황이면 당신은 우리보다 처지가 조금은 나은 겁니다.

 

그러나 이건 어떻게 위로의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이제 시작이지만, 우리는 어쨌든 끝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이대근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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