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우리는 평화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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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한반도 칼럼

[정동칼럼]우리는 평화로 간다

by 경향글로벌칼럼 2018. 6. 15.

6월12일 싱가포르에서 역사가 만들어졌다. 전쟁과 분단의 시대를 마감하고 공존과 평화의 시대로 향하는 문이 열린 날이다. 센토사섬 카펠라호텔 현관 양쪽 회랑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이 중앙으로 걸어 나와 12.5초간 나눈 악수는 70년 묵은 적대감과 지난 수년간 임계점에 다다랐던 전쟁위기가 극적 반전을 맞는 순간이었다. 4월27일이 분단과 전쟁의 상징이었던 판문점이 평화로운 한반도를 여는 상징이 되었던 것처럼, 한때는 ‘죽음 앞의 섬’이라는 별명을 가질 만큼 해적과 폭력, 전쟁과 학살의 어두운 역사가 있던 센토사섬은 평화의 섬으로 재탄생할 기회를 얻었다.

 

오랜 세월이 만든 좌절감과 냉소의 관성이었을까? 70년 적대관계를 뒤로하고 평화를 향해 협력하겠다는 공동성명문에 서명까지 했음에도 전율의 시간을 맞은 지 불과 반나절 만에 성과에 대한 평가절하가 시작됐다. ‘만화 같다’는 한 미국 언론의 표현이나 ‘공상과학영화의 판타지 장면 같다’는 김 위원장의 표현도 있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부정적 평가가 고개를 들고 있다.

 

그러나 두 정상은 미국 내부를 점령하다시피 한 회의론자와 비판자들의 반발을 의식하기보다는 상호신뢰 확보가 우선임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이들이야말로 전형성과 경로종속성을 탈피하고 새로운 시대로 가는 중요한 추동력을 공급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공개된 공동성명문 내용도 평가절하받을 이유는 없다. 세계역사상 정상 간 공동성명들이 그랬듯이 디테일보다는 원칙과 약속 위주로 구성되어있다는 점에서 모호성만 가지고 비판하기 어렵다. 제작 김정은, 감독 문재인, 영감(inspired by) 트럼프.

 

물론 구체적 실행방안과 타임프레임이 담겼으면 더 좋았겠지만 과욕일 수 있고, 성명문에 담지 않은 합의가 있을 상당한 가능성을 염두에 둔다면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정상회담 전날 심야의 전격 실무회담은 합의를 위한 막판 줄다리기보다는 그동안 미국이 요구했던 비핵화의 과감한 초기 조치, 소위 ‘프런트 로딩’에 대한 김 위원장의 결단을 전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폼페이오가 정상회담 하루 전에 백악관 출입기자단을 상대로 한 브리핑에서 “미국이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결과는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CVID)”라고 자신 있게 말했던 것이나, 트럼프가 회담 당일 새벽에 증오자와 패배자들을 비난하며 성공을 확언했던 것을 통해 추정해볼 수 있다.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미국의 ‘CVID 근본주의’ 문제다. 판문점선언과 싱가포르선언 모두 완전한 비핵화, 즉 CD라고 명문화하고 있음에도 미국에서는 ‘V’와 ‘I’가 빠졌다고 비핵화가 아니라고 비판한다. 그런데 실현 가능한 수준에서의 CVID를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완전한 비핵화를 명기한 것은 현실적 최대치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북·미 성명에서는 판문점선언보다 강한 표현인 ‘단단하고 흔들리지 않는 완전한 비핵화’라고 적시한 점은 진전이다.

 

아무튼 ‘I’는 북한의 반발이 타당하므로 빠지는 것이 맞다. 주권국가로서 상황이나 조건이 변해도 입장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미국이 북한의 비핵화 행동에 따라 체제안전 보장 약속을 변경할 수 있듯이, 북한도 미국이 약속을 깰 경우 바꿀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 공평하다. 박근혜 정부가 일본과 맺은 위안부 합의에서 주장하는 비가역성의 부당성을 우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또 검증을 말하는 ‘V’는 필요한 과정이지만 북한이 핵무기를 완성한 후에는 효용성이 반감됐다. 즉 북한이 핵을 가지기 전까지는 검증만으로도 비핵화가 가능할 수 있었으나, 핵을 완성한 후에는 검증만으로 확인이 불가능하고 북한의 자발적 신고와 폐기에 대한 신뢰가 동반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자구에 매달리지 말고, 김정은 위원장의 진정성을 의심하기보다 역진하지 않도록 분위기를 만들고 기정사실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긍정적인 것은 이번 공동성명을 통해 한국의 역할이 부쩍 커졌다는 것이다. 공동성명의 판문점선언을 재확인한다는 표현도 그렇지만 회담 전후 내내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두 정상의 의지가 읽혔다.

 

북·미 양국의 불신구조에서 싹트는 신뢰의 배아(胚芽)는 한국의 보증을 받고 싶어 한다. 북·미 회담 이후 남·북·미 리더는 확실히 한배를 탔다.

 

트럼프의 기자회견이 시작되기 전에 매우 이례적으로 비디오클립이 상영되었는데 북한에 전쟁과 평화 사이의 선택을 촉구하는 영상이었다. 끝난 후 엔딩크레디트를 올린다면 아마도 다음과 같을 것 같다.

 

<김준형 한동대 교수·국제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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