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핵폐기와 권력의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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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한반도 칼럼

[정동칼럼]핵폐기와 권력의 드라마

by 경향글로벌칼럼 2018. 5. 25.

연일 한반도와 미국의 정세가 극적으로 펼쳐지고 있다. 한·미연합 군사훈련 등의 이유로 갑자기 냉각되었던 남북관계 국면은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회담에서 체제안정과 경제지원에 대한 미국의 직간접적 보장이 북한 측에 제시되면서 다시 진정 국면에 접어든 듯하다.

 

나는 대한민국과 세계의 ‘시민’으로서 또 여자로서(즉 시민이라는 위상이 여성으로서의 정체성과 아직도 합치하지 않기 때문에), 말하자면 두 겹의 시선으로 전례 없는 이 상황을 지켜보게 된다. 비핵화와 평화의 전망에 감격하면서도, 이른바 ‘정상’의 지위에 있는 남성들을 주체이자 매개로 삼는 이 일련의 정치상황이 그들의 남성성 및 국가의 남성적 성격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현실정치란 개인의 성격으로 환원될 수 없는 조직적 기획이고, 정치가의 공적 인격은 일종의 퍼포먼스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트럼프나 김정은 위원장의 충동적, 독단적, 폭력적 특성은 권력의 과시, 유지를 위한 연출이기도 하다.

 

풍계리 핵실험 관리 지휘소 시설의 폭파 순간. 목조 건물들이 폭파되며 산산조각 나고 있다. 북한은 이날 지휘소 시설 7개동을 폭파했다. 사진공동취재단

 

군사력을 대규모로 조직화하고 타자, 타국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방식으로 세계 권력의 위계질서를 형성한 근대의 역사는 공격적 남성성을 규범으로 여겨온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국가 권력은 구조나 실천의 측면에서 여전히 남성적이다. 제국주의의 팽창, 실제로 일어났던 식민 정복과 세계대전, 아직도 진행 중인 세계 각지의 전쟁은 지극히 남성적인 수사법과 행위방식을 통해 수행되는 폭력을 드러낸다. 물론 그러한 폭력의 희생자에는 그 폭력의 행위자인 남성들이 포함된다.

 

북한이 그토록 공들여 핵무기를 개발한 것이 마침내 핵무기를 폐기하기 위해서였다는 점은 자못 흥미롭다. 북한이 핵을 개발한 이유는 물론 강대국 특히 미국에 위협이 될 정도의 존재감을 무력으로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미국이 원하는 대로 핵무기를 폐기하고 그 대가로 정상국가로 인정받고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는 거래의 시나리오에는 묘한 오이디푸스적 역설이 있다.

 

이미 권위를 가진 존재인 아버지, 가부장과의 대결구도 속에서 결국 거세의 가능성, 즉 아버지가 나를 거세할 권위를 가진 존재임을 인정함으로써 가부장적 권위를 공유할 자격을 인정받게 된다는, 프로이트 정신분석이 설명하는 오이디푸스적 남성성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핵실험장 폐기가 세계의 구경거리가 됨으로써, 거세를 통한 남근적 권력의 공유라는 오이디푸스적 남성성의 역설이 일종의 퍼포먼스로 실현되는 셈이다.

 

북한의 비핵화는 어떤 결과로 이어질까. 물론 나는 비핵화를 전격 지지하며, 그것을 기점으로 평화협정이 체결되어 정말 우리가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나 평화로운 삶을 유지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핵무기로 대표되는 파괴적 군사력을 보유하는 것이 모종의 패권을 의미하는 한, 세계의 권력 구도에서 고립, 삭제되지 않기 위해 북한과 같은 경로를 택하는 국가나 단체들이 계속 생겨날 가능성은 남는다. 그리고 핵을 보유하는 소수를 대표하여 미국이 핵 확산을 방지하고 억제하는 감시자의 역할을 자임하는 한, 핵무기의 남근적 권력을 둘러싼 이 소모적인 거래는 반복될 것이다.

 

선거운동을 하던 시절에 트럼프가 장애를 가진 기자를 흉내내며 조롱하던 장면을, 또 그가 여자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그녀의 성기를 움켜쥐면” 된다고 다른 남자에게 자랑 삼아 이야기했던 대화의 녹취파일을 나는 잊을 수 없다. 그의 문제들이 언론에서 수없이 공개되었어도 그가 미국의 대통령이 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한반도와 세계의 평화를 위해 그런 그의 정치적 계산에 호소해야 하다니 두렵고 난감한 일이다.

 

충동적, 독단적, 폭력적인 특성이 공통점인 두 지도자들 사이에서, 또 자국의 이익을 대변해야 하는 공적 임무와 자신의 개인적 위상에 대한 나르시시즘적 욕망으로 추동되는 여러 정상들 사이에서, 협상가이자 중재자로서 문재인 대통령의 역할과 역량은 매우 중요하다. 공격적 남성성이 각축하는 국제정치의 한가운데서 문 대통령은 공격성이나 나르시시즘과는 다른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가 새로운 남성 지도자의 모델을 제시하고, 그로써 평화와 상생을 최우선 목표로 삼는 정치를 더 효율적으로 이룰 수 있음을 증명할 수 있을지는 커다란 관심사이다. 또한 그가 그러한 지도자적 역량을 국내 정치의 차원에서 어떻게 발휘할지에도 귀추가 주목된다.

 

미투의 시대에도 여전히 페미니즘이 낙인처럼 여겨지는 우리 사회에는 온화한 가부장의 역할을 넘어서는 정책이 필요하다. 페미니즘 교육 의무화를 요청하는 청와대 청원이 이제 어떠한 정책과 실천으로 이어질지 기대하는 마음은, 세계의 비핵화와 평화에 대한 열망과 맞닿아 있다.

 

<윤조원 고려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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