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 바짝 차린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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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윤희일의 특파원 칼럼

정신 바짝 차린 일본

by 경향글로벌칼럼 2016. 5. 10.

어린 시절 당연히 한국에서 만든 것으로 여기고 본 <엄마 찾아 3만리> <플랜더스의 개> 등 유명 애니메이션은 대부분 일본제였다. 이런 사실을 나중에 알고 내가 느꼈던 배신감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학창 시절 읽은 상당수 서양 문학 작품이 일본어로 먼저 번역됐다가, 다시 한국어로 번역됐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한동안 TV 등 가전제품은 일제가 최고였다. 삼성전자나 금성사(LG)의 TV가 일반적일 때 소니TV가 있는 집에 가면 기가 죽곤 했다. 당시 소니TV는 요즘 독일제 자동차 이상의 고급스러움으로 다가왔다. 2003~2004년 일본에서 생활할 때 일본 가전제품 매장에서 한국의 TV나 냉장고, 세탁기가 싸구려 특판행사에나 나오는 것을 보고 가슴이 쓰렸던 기억이 새롭다. 당시 일본에서 드라마 <후유노소나타>, 그러니까 <겨울연가>가 크게 히트했지만, 일본인들이 한국 상품을 보는 눈은 여전히 싸늘했다. 이후 현대자동차는 ‘욘사마’ 배용준을 모델로 기용해 일본에서 쏘나타 자동차를 팔았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일본의 문화콘텐츠와 가전제품은 한때 자국과 세계시장을 지배했지만 그 힘은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니었다. 글로벌 시장의 소비자들은 끊임없는 혁신을 통해 새로운 제품을 내놓고 있는 한국의 TV와 세탁기를 더 선호하고 있다. 애플의 아이폰으로 시작된 스마트폰 경쟁에서 한국 제품은 세계 톱 자리에 올랐지만, 일본 제품은 자국 국민들조차 ‘2류’로 여기는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최근 일본 전자업계의 간판인 샤프가 해외(대만) 기업에 팔려나간 뒤 바로 1000여명의 노동자가 구조조정의 대상이 됐다는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다. 일본의 가요·드라마·영화 등 문화콘텐츠도 한류에 밀려 맥을 못 춘다.

아베신조 일본총리_연합뉴스


하지만 요즘의 일본은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전자·문화콘텐츠 등에서 경쟁국에 시장을 내주는 뼈아픈 경험을 한 일본이 미래의 먹거리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한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한발 앞서가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일본은 요즘 자율주행자동차, 드론, 인공지능(AI) 분야의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올 재팬(all japan)’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은 자율주행자동차의 개발을 촉진하기 위해 영화세트장처럼 생긴 자율주행자동차 전용 시험주행도로까지 건설해 주겠다고 나섰다. 도요타·닛산·혼다 등 업계는 자동차의 자율운전에 꼭 필요한 8개 분야에서 공동연구에 착수했다.

일본 정부는 최근 지자체·업계 등과 함께 도쿄 인근에서 드론을 통한 상품 배달 실험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인공지능 분야의 연구·개발에 관련된 국제규칙 제정을 일본이 주도하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아직은 ‘블루오션’으로 여겨지는 자율주행자동차나 드론·인공지능 분야에서 글로벌 시장을 먼저 차지하기 위한 포석이다.

잃어버린 문화콘텐츠 시장을 되찾기 위한 활동에도 적극적이다. ‘쿨 재팬’ 브랜드로 일본 문화콘텐츠의 르네상스를 노리고 있는 일본 정부는 한류의 세계화 과정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면서 전열을 재정비하고 있다. 상당수 전문가들은 세계시장의 강자로 군림하고 있는 한국의 전자산업이 중국세에 점차 밀리면서 머지않아 최근의 일본과 비슷한 신세가 될 수 있다고 전망하고 있다. 이 경우 대기업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은 한국은 업계의 침몰과 함께 국가까지 위기에 빠질 수 있다는 분석도 뒤따른다.

떠오르는 중국에 밀리고, 다시 일어서는 일본에 치여 침몰의 시기가 당겨질 수 있다는 경고는 그냥 경고로만 들리지 않는다. 업계는 물론 정부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일본의 샤프가 요즘 겪는 어려움은 ‘기업 차원’에 머무르고 있지만, 한국의 삼성이나 LG에 닥쳐올 어려움은 ‘국가 차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도쿄| 윤희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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