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 ‘미투’, 남의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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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 ‘미투’, 남의 일일까

by 경향글로벌칼럼 2018. 2. 27.

문화·종교계 남성 인사들의 성폭력 전력을 폭로하는 증언이 봇물 터지듯 이어지고 있다. 누가 더 충격적인지 경중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다.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다’는 명제는 만고불변의 진리였음을 새삼스레 깨닫게 되는 시기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남성이 권력을 행사해 여성에게 성적 관계를 강제하는 일은 지역과 문화를 막론하고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미투(나도 당했다)’ 운동이 시작된 미국을 포함해 선진국이라 불리는 국가도 일부 남성의 성의식 수준은 한국보다 나을 게 없다.

 

가장 최근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한 유력 인사는 바너비 조이스 전 호주 부총리다. 조이스는 그의 공보 비서였던 여성과 내연 관계임이 보도된 데 이어 별도의 성폭력 의혹까지 받고 있다. 2주간 비판 여론이 들끓자 결국 그는 소속 국민당 대표직과 부총리직에서 물러났다. 부총리가 일으킨 스캔들은 내각 조직문화에 대한 토론에 불을 댕겼다. 맬컴 턴불 호주 총리는 장관과 부하직원의 성관계를 금지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는 “장관 윤리강령에 매우 분명하고 명백한 조항을 추가할 것”이라며 “결혼을 했든 하지 않았든 장관들은 직원과 성관계를 가져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그간 개인의 양심과 도덕에 맡겨뒀던 사안을 윤리강령에 넣어 당 차원에서 관리하겠다는 얘기다.

 

총리가 이렇게까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는 것은 정치인이 직원에게 성적인 관계 맺기를 요구하는 일이 그만큼 만연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정치인과 부하직원 간에 사랑이 싹트는 상황도 없지는 않겠으나, 대다수 직원들은 상급자의 심기를 거슬렀을 때 닥칠 불이익이 두려워 불쾌한 언행을 간신히 참아주고 있을 것이다.

 

정치인과 부하직원의 성적 관계라면 미국도 일가견이 있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당시 백악관 인턴이던 모니카 르윈스키의 염문이 대표적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서도 과거 그에게 성추행당했다는 여성들의 폭로가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미국 의회는 호주보다 먼저 의원들과 직원 간 관계 단속에 나섰다. 이달 초 미 하원은 의원과 직원의 성적 관계 맺기를 금지하고, 의원이 성추행 등으로 송사에 휘말렸을 때 합의금을 세비가 아닌 사비로 지급해야 한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할리우드에서 시작된 미투 운동이 정치권에도 경각심을 일으킨 셈이다. 결의안이 정식 발효되려면 상원의 표결과 트럼프 대통령의 서명이 필요하지만, 의회가 자정 움직임을 보인다는 사실은 평가할 만하다.

 

영국 의회도 미투 바람을 피하지 못했다. 지난해 말 데이미언 그린 부총리가 성추문으로 낙마한 뒤 의회 내 성폭력조사위원회가 발족해 실태 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지난해 의회 직원 5명 중 1명이 성폭력을 당하거나 목격한 것으로 나타났다. 성폭력조사위는 의원의 성폭력 사실이 확인될 경우 의원직을 박탈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그린 전 부총리에게 성희롱당한 사실을 폭로한 칼럼니스트 케이트 말트비는 최근 일간 가디언 기고문에서 영국의 한 의원실에서 있었던 일화를 소개했다. A의원 사무실에 들렀다가 25세 여성 직원을 발견한 B의원이 A의원에게 “자네가 갖지 않겠다면 내가 가져도 되겠느냐”고 공공연히 물었다는 얘기다.

 

말트비는 “의원들은 자신을 신이라고 여긴다”며 “그들은 하급 직원들과의 직업적 경계가 어디까지인지 가르쳐주지 않는 문화 속에 살고 있다”고 지적했다.

 

권력을 가진 정치인이 직원에게 지켜야 할 선을 지키지 않는 게 어디 영국 의회만의 일일까. 한국 국회의원들의 성의식 수준이 미국이나 영국 의원들보다 높다는 근거가 발견됐다는 소식은 아직 듣지 못했다. 현재 문화·종교계에 번진 미투의 들불이 언제 정치권으로 옮겨붙을지 노심초사할 국회의원이 다수가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국제부 | 최희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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