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반기문의 소명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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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유신모의 외교 포커스

정치는 반기문의 소명 아니다

by 경향글로벌칼럼 2017. 2. 6.

- 2월 1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수년 전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의 대통령선거 출마설이 본격적으로 제기될 때 모든 정치부 동료들은 그가 결국 대선에 출마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정치 권력에 최우선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들의 시각으로는 대권을 마다할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처럼 보이지만, 세상에는 다양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하고 권력이 아닌 다른 것에 삶의 목표를 둔 사람들도 많다고 반박했다. 그리고 반 전 총장은 ‘세계 최고의 외교관’이라는 명예를 권력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할 것이므로 출마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나의 예측은 틀렸다. 그는 설마설마하는 사이 정치 행보를 노골화하더니 사무총장 임기가 끝나자마자 정치판에 뛰어들었다. 측근들은 이를 ‘시대적 소명(召命)’이라고 했다. 반 전 총장이 나섰다기보다 시대가 그를 정치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소명 의식이 있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일단 그의 권력 의지는 충만해 보인다. 지난 세월 내가 알고 있던 반기문과 지금의 반기문 중 어떤 것이 진짜 모습인지 혼란스럽다. 정치적 이념과 그의 현실적 성공 가능성 여부 등은 모두 제쳐놓고, 나는 여전히 그의 선택이 아쉽고 안타깝다.

 

반 전 총장과 정치적 성향을 달리하는 사람들은 그가 출마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이유 중 하나로 ‘유엔 사무총장은 퇴임 직후 자국 정부의 직책을 맡는 것을 삼가야 한다’는 1946년 유엔총회 결의안을 거론한다. 당시 국제사회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후질서를 만드는 데 유엔이 핵심적 역할을 할 것으로 생각했다. 유엔 사무총장이 각국의 지도자와 내밀한 이야기를 나누고 정보를 취득한 뒤 자국으로 돌아가 이를 활용하게 되면 곤란하다는 우려 때문에 이 결의안이 생겼다.

 

하지만 유엔은 그런 막강한 권한을 가진 기구가 되지 못했다. 유엔 사무총장도 강대국 간 이해관계의 균형을 유지하는 역할에 머물렀다. 유엔 사무총장의 권한과 이점을 자국 정치에 활용할 것에 대한 우려는 기우로 드러났고 결의안은 유명무실해졌다. 이처럼 구속력도 없고 의미도 퇴색한 낡은 결의안을 들이대면서 ‘대선에 출마하면 안된다’고 정색을 하고 싶지는 않다. 이 결의안 말고도 반 전 총장이 출마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들자면 족히 10가지는 댈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의 현실에 대한 반 전 총장의 인식은 절박하지도, 정확하지도 않다. 그는 지금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시대정신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통합’이라고 했다. 과연 그런가. 지금의 혼란은 정쟁이나 이념·세대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일찍이 청산했어야 할 비민주적 구태와 적폐를 키우고 키워온 결과다. 지금은 ‘이쯤 해두고 힘을 합치자’며 통합을 말할 때가 아니다. 맹렬한 자성과 혁신을 통해 구시대와 완전히 결별해야 할 때이며 정의와 상식이 작동하는 국가구조를 말할 때다. 반 전 총장이 말하는 대통합은 구태로 사분오열된 여당을 끌어모아 야권에 대항할 ‘통합 챔피언’이 되겠다는 의미인가.

 

유엔 사무총장으로서의 10년 경험을 살려 한국 정치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말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유엔 사무총장 경험을 살려서 활동해야 할 분야는 한국 정치가 아니라 세계사회운동이다. 반 전 총장은 한국 정치보다 국제적 현안 해결을 위한 노력에 최적화된 인물이다.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 상황은 인종·종교 갈등, 인권, 개발협력, 환경 등의 분야에서 나타난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출현으로 상황은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사안의 중요도로 따진다고 해도 국내 정치에 비할 바가 아니다. 반 전 총장이 유엔에서 내내 천착해온 기후변화 문제는 인류의 생존과 직결된 사안이다. 인류 공멸이라는 관점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면 남중국해 갈등이나 북핵 문제 같은 것은 ‘망망대해를 떠도는 한 조각 미풍’처럼 사소한 것일 수도 있다.

 

정치를 말하기 시작하면서 반 전 총장은 많은 상처를 입었다. 유엔 사무총장으로서의 업적은 지나치게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고, 전두환 독재 시절 김대중 전 대통령을 사찰했다는 오해는 사실로 굳어졌다. ‘자연인 반기문’이었다면 친근한 모습으로 받아들여질 사소한 실수 하나하나가 매서운 비판과 조롱의 대상이 됐다. 지금 그는 정치적 성향이 모호하다는 지적을 받으면서 모두에게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지만, 정치적 색깔을 분명히 하면 할수록 적은 늘어날 것이다. 또 그와 한편이 되지 못한 정치세력은 그를 사정없이 물어뜯을 것이다.

 

자신이 해야 하고, 또 잘할 수 있는 일을 제쳐두고 명분도 없는 낯선 싸움터에 뛰어들어 최소 50% 이상의 국민으로부터 비난과 조롱을 받게 되는 것이 하늘이 그에게 내린 소명일 리 없다. 반 전 총장은 진보·보수로부터 모두 인정받는 인물이 되는 것으로 한국 정치에 충분히 기여할 수 있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반 전 총장이 몸에 맞지 않는 정치의 옷을 벗어던지고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간다면 여전히 그를 존경할 용의가 있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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