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아메리카노] 한나 아렌트의 무덤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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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 가다 /지난 시리즈

[카페 아메리카노] 한나 아렌트의 무덤을 찾아서

by 경향글로벌칼럼 2010. 11. 2.

한나 아렌트의 묘비


한나 아렌트의 무덤을 찾아서

  
내가 하버드 대학과 뉴욕 시에 위치한 뉴스쿨을 놓고 연구년을 지낼 장소로 고민하던 순간에 결정적으로 나를 이끈 것은 뉴스쿨이 가진 한나 아렌트와의 인연 때문이었다박사학위 논문을 한나 아렌트와 위르겐 하버마스라는 두 현대 사상가의 이론을 다루는 주제로 썼는데귀국을 해 보니 하버마스는 이미 한국에 많이 소개되고 연구된 반면에 아렌트는 거의 소개가 되질 않고 있었다그래서 나는 귀국 후에 아렌트의 저술을 번역하는 일에 관심을 쏟게 되었고다른 동료 교수들과 더불어 기울인 노력 덕분에 지금은 대부분의 아렌트 저술들을 우리말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그리고 나는 한국에서 아렌트 연구가로 자리매김이 되어 버렸다.

아렌트 컨퍼런스에 대한 비판

역시 뉴욕은 아렌트의 흔적을 많이 담고 있었다뉴스쿨에 있는 아렌트 도서관은 물론이고뉴스쿨의 철학 교수들은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아렌트의 사상과 관련을 맺고 있었다이번 학기에 새로 부임한 이태리 출신의 여교수도 고전철학을 전공하는 가운데에도 아렌트의 철학을 자신의 신화 연구에 활용하고 있었다아렌트는 여러 학교에서 강의를 했었으나 그 가운데서도 뉴스쿨은 정년을 할 때까지의 인생의 마지막 시간을 장식했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최고의 사회사상가이자 내 논문의 다른 주요 인물이었던 하버마스도 아렌트와는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두 사람은 1968년에 뉴스쿨에서 처음 만났고이후로도 여러 차례 만남을 가졌으며, 1980년에 있었던 뉴스쿨의 졸업식에서 하버마스는 자신의 사상의 발전에 있어 아렌트에게 크게 빚진 바가 있다고 고백을 했다. (지금의 디자인 학교인 파슨스 등의 학교를 포함하면서 규모가 커졌지만 원래는 사회연구를 위한 뉴스쿨[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라는 이름의 대학원 학교로 시작이 되었고지금도 이 뉴스쿨은 8개의 인문사회분야의 대학원으로 존재하고 있다.)


번스타인 교수 댁에서의 저녁식사 자리에서 만난 제롬 콘은 아렌트의 마지막 조교였다
함께 만났던 여성철학자 셰일라 벤하비브도 아렌트 연구로 명성이 높다그 저녁식사 자리에서 10월말에 있게 될 아렌트 컨퍼런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그러자 벤하비브는 화난 표정에 높은 언성으로이번 컨퍼런스의 주제는 아렌트 사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에 자기는 가지 않을 것이라고 했었다참석자 명단에서 그녀의 이름을 발견했었기 때문에참석을 통보한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그러나 벤하비브의 대답은 강경했다.


한나 아렌트 컨퍼런스는 
10월 22일과 23일 양일에 걸쳐 바드 칼리지에서 열렸다바드 칼리지는 뉴욕주에 속해 있고 맨해튼에서 북쪽으로 한 시간 반 정도를 운전해야 도착하는 정도의 거리에 위치해 있다

바드 칼리지로 가는 1시간 반 동안 창밖에는 단풍이 너무나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다. 가던 길에 한 컷.



아렌트 컨퍼런스가 열린 바드 칼리지의 올린 홀. 숲 속에 건물이 있다.


미국에서 대학의 랭킹을 말할 때 종합대학과 리버럴 아츠 칼리지를 구분해서 말한다
미국인들 가운데는 종합대학보다는 학생수가 8백명에서 15백명 정도의 규모로 섬세한 지도를 해 주는 리버럴 아츠 칼리지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다바드 칼리지는 상당히 상위권에 랭크가 되어 있는 대학이다

바드 칼리지 캠퍼스 안에 있는 도로 주위의 단풍 모습


이 대학은 한나 아렌트의 남편이었던 하인리히 블뤼허가 전임으로 강의를 했던 곳이고
지금 그 두 사람의 무덤이 그곳에 자리잡고 있다.

  
머무름과 나아감


바드 컬리지의 아렌트 연구소장 로저 버코위츠



컨퍼런스의 주제는 
비인간적 시대의 인간이었으며초인간적인 기술적 진보가 이루어진 이 시대에 인간적이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중심 테마로 하고 있었다마침 올해는 바드 칼리지가 생겨난 지 150년이 되는 해였고이를 기념하기 위해 일년내내 인간적이라는 것(to be human)”이라는 테마로 각종 행사를 벌여오던 터였다문제는 이러한 주제가 정치사상을 핵심으로 하는 한나 아렌트와는 별로 주제적인 연관성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첫 번째 주제 강연을 한 이는 레이 커츠웨일(Ray Kurzweil)이었는데그는 유명한 미래학자이가 기술발전을 통한 인류 진보를 신봉하는 이였으며강연을 통해서도 내내 인류가 궁극적으로 단수성(singularity)에 도달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역설하였다단수성은 인간의 근본적인 복수성(plurality)를 주장하는 아렌트의 사상과는 정반대의 개념이다


컨퍼런스에서 수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미래학자 레이 커츠웨일


이 강연이 끝난 뒤아렌트의 마지막 조교였던 제롬 콘과 나는 강연장 복도에서 함께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그는 갑자기 열을 내면서아렌트가 이 강연을 들었다면 10분도 채 되질 않아, “넌센스라고 말하고 뭔가 듣기 좋지 않은 말을 내 뱉은 뒤 자리를 떴을 것이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강연을 조직했던 로저 버코위츠와 강연자 레이 커츠웨일이 지나가고 있었다그들이 들으라고 큰 소리로 말했던 것 같았다로저 버코위츠는 바드 칼리지에 있는 아렌트 연구소 소장으로 일하며 일 년에 두 차례 열리는 아렌트 컨퍼런스를 중심에서 기획하고 있는비교적 젊은 축에 속하는 학자이다

아렌트의 조교였던 제롬 콘(사진 가운데)과 엔젤소프트 사장 데이빗 로즈(사진 오른쪽). 두 사람은 서로 반대의 입장에서 불꽃튀는 주장을 펼쳤다.


사실 컨퍼런스 자체는 모험적이긴 했으나 유익했었다후대의 사람들이 아렌트의 사상을 활용하면서 그의 사상적 범주 안에만 머물러 있을 필요는 없다새롭게 봉착한 문제들에 대해 아렌트적 관점에서 해명하고 접근하려는 노력은 얼마든지 필요한 것이다특히 우리와 같은 입장에서는즉 서구와는 동떨어진 정치적역사적지적 전통과 환경 속에서 활동하는 입장에서는아렌트 자체에 충실하게 머무르면서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여기서 더 나아가 우리의 정치적사회적 경험을 이해하고 또 우리의 문화와 환경을 발전시키는 데 어떤 통찰력을 얻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그런 점에서 컨퍼런스에 대한 논란그리고 컨퍼런스 과정에서의 토론을 지켜보는 것은 흥미로웠다


컨퍼런스에서 우연히 나란히 자리에 앉았던 사람은 아렌트의 책을 독일어로 번역한 우르술라였다
레이 커츠웨일의 문제의 강연을 나란히 앉아 들으면서도 누군지 몰랐으나나중에 제롬 콘이 서로가 누구인지를 알려주었다우르술라는 특히 <한나 아렌트의 사유의 일기>를 독일어로 내어 유명한 사람인데이 책의 일부는 번역된 아렌트 유고집 <정치의 약속>의 후반부에 정치로의 입문이라는 제목으로 들어가 있다아주 흥미로운 내용의 아렌트 글 모음이다그녀 또한 이번 컨퍼런스에 대해 약간은 비판적이면서도 흥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첫째 날 오후에 있었던 제롬 콘과 데이빗 로스와의 패널은 정말 재미있었다
제롬 콘은 아렌트의 사상을 정확하게 요약하면서 자동화 기술이 가져올 사회적 문제로서의 인간의 잉여성 문제를 정확하게 비판하였다하지만 엔젤소프트라는 컴퓨터 프로그램 회사의 사장이자 기술문명 신봉자인 로스는 자동화가 우리사회에서 불가피할 뿐 아니라 불가능하리라고 여겨졌던 일들이 가능하게 해 줌으로써 인간의 삶의 질을 얼마나 긍정적으로 바꾸어 놓을 것인지에 대해 달변의 웅변을 토했다

하지만 청중들은 그러한 진보에 대해 회의적이었고
따라서 비판이 쏟아졌다하지만 자신의 신념과 생각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미래의 진보에 대한 신념을 흔들림이 없이 토로하면서 강연장은 시종 팽팽한 긴장 속에 있었다

결론은 어떻게 났을까
물론 결론은 없었고 토론은 평행선을 길게 그으면서 끝났으며기술문명의 진보론자들은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경제적 이윤추구와 더불어 물질적인 힘도 더불어 장악하면서 사회적 영향력을 높이고 있지만 철학을 하는 사람들은 어디서나 차분히 문제점에 대해 성찰하고 비판점을 빠짐없이 건드려보는 느리고 낮은 자세를 보일 뿐임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강연이 끝나고 질의 응답시간이 되자, 청중들이 설치된 마이크 뒤로 길게 줄을 서서 차례로 질문을 했다.


우르술라는 내게아렌트라면 여기서 어떻게 말했을까고 물어왔다그녀가 바라는 대답은잠시 여기서 중지하고 생각해 보라자신의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이라는 것이었다물론이다바쁘게 움직이며 과학과 기술이 닦달하는 대로 쫓겨 정신없이 발명하고 응용할 것이 아니라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이것이 과연 악을 창출하는 것은 아닌지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행복을 도모하는 길인지를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Think! 
하지만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저처럼 강력한 신념을 가진 이들이 빠져 있는 이론적,논리적 자기모순점은 무엇인지를 짚어내면서 그들의 한계를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생각은 필수적이지만그 생각 속에서 무엇을 짚어내야 할는지를 개인의 차원에서 곰곰이 생각만 하고 있어서는 곤란하다. 무엇이 문제인지에 대한 논거는 다양한 분야에서 수많은 형태로 제시되고 논의되어 왔기 때문이다.

 

아렌트 무덤을 찾아서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아렌트의 무덤을 찾아보았다패널 토론과 주제발표가 이루어졌던 강연장 뒤쪽 숲으로 약 5분을 걸어가니 조그만 공동묘지가 나왔다학교 캠퍼스 안쪽에 위치한 조그만 동산의 숲에 있었다

아렌트 부부의 무덤이 있는 공동묘지 전경



우르술라의 안내로 묘지를 찾았다어느 무덤에는 커다랗거나 작은 묘비가 세워져 있었으나아렌트의 묘지에는 평면으로 된 묘비가 바닥에 누워 있었다남편의 묘비와 나란히

아렌트 부부의 묘비. 앞쪽 바닥에 누운 가운데 두 개의 사각형 묘비 중 오른쪽이 아렌트의 것이고 왼쪽이 남편의 것.


사람은 이렇게 죽어 땅에 묻혀 있으나
그가 남긴 말은 지금도 살아서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깨치고 더 깊은 생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아렌트는 말하는 사람을 신뢰할 것이 아니라말을 신뢰하시오.”고 말했다

남편 블뤼허는 바드 칼리지 학생들에게 “비관주의자들은 겁쟁이들이고 낙관주의자들은 어리석은 자들이다.”라고 종종 말했다아렌트는 스승인 야스퍼스의 말 “과거나 미래에 굴복하지 말라.중요한 것은 전적으로 현재를 충실히 고찰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평생 깊이 간직했다


한나 아렌트의 묘비


무덤 앞에는 작은 돌로 된 벤치가 놓여 있었다
누군가가 이 글을 읽고 혼자서 무덤을 찾아 간다면공동묘지 우측 끝 가까이 있는 의자를 찾으면 될 것이다묘지 전체에는 이 돌로 된 벤치와 나무 의자가 유일하게 이곳에만 놓여 있기 때문이다

 

필자도 무덤 앞 돌 벤치에 앉아 보았다.



아렌트는 커다란 교통사고를 당해 심각한 부상을 당했던 일이 있었다가까스로 죽음을 모면한 그녀는 당시 임종했던 교황 요한 23세가 임종시에 한 말인, “모든 말은 태어나기에 좋은 날이고모든 말은 죽기에 좋은 날이다.”라는 구절을 당시에 쓴 어느 글에서 인용했다

그녀는 또 이후에 후두염으로 고생하면서도 친구에게 쓴 편지에서 
나는 확실히 건강을 위해 살고 있지는 않기 때문에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할 것이오.”라고 말했다그녀는 죽었으나 그녀의 말은 살아 있고 그녀는 무덤에 묻혔으나 많은 살아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무덤 앞에 앉아 생각하게 만들고 있다.

  

바드 칼리지의 가을


바드 칼리지의 가을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이번 가을은 이상 기온 때문에 더욱 아름답다고 한다지난 여름에 이 지역에는 전과는 다르게 비가 많이 내렸고또 무척 더웠다그래서 나무 잎사귀들이 무성하게 자랄 수 있었던 것이다게다가 이번 가을에는 바람이 비교적 많이 불지 않아 아름다운 단풍잎들을 나무들이 오래 간직할 수 있었다이상 기온이 가져다 준 특별한 선물이 이번 가을의 단풍인 셈이다.이곳에 사는 이들도 유난히 아름다운 올해의 단풍을 즐기고 있다


학생 기숙사 앞의 아름다운 나무


학생 기숙사 앞의 아름다운 나무



하지만 바드 칼리지는 좀 특별히 느껴졌다이렇게 아름다운 학교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미국에 와서 수많은 학교들을 보았지만바드 칼리지처럼 자연 속에 건물들을 세워 놓으면서도 자연과 더불어 캠퍼스가 꾸며진 경우는 처음 보았다

물론 과문 탓일 것이다
미국의 수많은 학교 가운데 내가 방문해 본 학교래야 열 개 남짓할 뿐이기 때문이다하지만 아렌트 컨퍼런스가 열린 이때는 일 년 가운데 단풍이 가장 아름다운 때밝은 햇빛 아래 물들어가는 단풍들이 환하게 빛을 내고 있는 순간이었다더욱이내가 존경하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던 철학자 아렌트의 무덤그리고 그 정신이 살아 움직이는 컨퍼런스의 장면과 함께 기억에 남을 캠퍼스이기 때문에 내게는 더더욱 아름다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바드 칼지에서 10여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오래된 마을인 라인벡의 중심가.
 

라인벡에 있는, 미국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여관, 베크맨 암즈 인.



<김선욱의 카페 아메리카노>는 3주에 1회 경향신문 본지 월요일자에도 연재 됩니다. 
블로그에서는 분량의 구애없이 좀 더 다양한 글과 사진을 싣고 있습니다. 
<한나 아렌트의 무덤을 찾아서>의 신문 버전(2010.11.1)은 다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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