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의 ‘탈진실’과 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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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박영환의 워싱턴 리포트

트럼프의 ‘탈진실’과 언론

by 경향글로벌칼럼 2016. 12. 28.

2016년 한 해가 저물고 있다. 지난여름부터 미국 대선을 지켜본 입장에서 올해의 상징을 꼽는다면 당연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다. 트럼프는 그 어떤 검증에도 굴하지 않고 미국의 45대 대통령이 됐다. “어떻게 저런 사람이…”라며 혀를 차고 한숨을 내쉬어도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트럼프와 함께 또 하나를 고르라면 그건 언론의 실패다. 언론의 실패는 트럼프 승리와 동전의 다른 면이다. 미국의 거의 모든 언론들이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의 승리를 예측했으니 민심을 읽지 못했다는 점에서 변명의 여지없이 실패했다. 주류 언론들은 백인 노동자 계급의 저변에 흐르는 기성 정치에 대한 분노를 알아차리지 못했고, 민주당 지지자들이 클린턴에게 얼마나 실망했는지도 몰랐다.

 

언론의 실패는 이것만이 아니다. 트럼프는 대통령감이 아니라고 99%의 언론이 주장하고 근거를 제시했지만 유권자들은 듣지 않았다. 언론의 역할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던지는 ‘진짜 실패’다.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의 편집장 수전 글래서는 대선 후 브루킹스연구소에서 발표한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저널리즘의 미래와 민주주의에서의 역할에 대해 존재론적 두려움을 갖게 됐다. 2016년 미디어 스캔들은 기자들이 미국 대중에게 전달하지 못한 데 있지 않다. 스캔들은 그들이 보도를 했고, 그것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유권자들이 사실(facts)에 근거한 기성 언론들의 보도를 무시하고 사실을 무시하는 악의적 짜깁기인 ‘가짜뉴스(fake news)’를 더 잘 믿는다면 민주주의 과정 특히 정치에서 언론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뒤편 왼쪽에서 두번째)가 선거본부장을 맡았던 켈리언 콘웨이(뒤편 왼쪽) 등과 함께 11월 22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 본사를 방문해 경영진과 칼럼니스트, 기자들과 대화하고 있다. 뉴욕 _ AP연합뉴스

 

옥스퍼드 사전이 올해의 단어로 ‘탈진실(post-truth)’을 선정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말하는 ‘브렉시트’와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 이후 이 단어의 사용 빈도가 급격히 늘었다고 한다. 사전은 그 개념을 “여론을 형성하는 데 있어 객관적 사실이 감정이나 개인적 신념에 대한 호소보다 영향력을 더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정의했다. 워싱턴포스트의 사실검증(fact checking) 블로그에서 트럼프는 4점 기준 ‘피노키오 척도’에 3.4를 받아 역대 최고 기록을 깰 정도로 거짓말과 근거없는 주장을 쏟아냈다. 하지만 그는 선택받았다. 언론이 트럼프의 성추행 자랑 발언을 공개하고 소득세 회피 사실을 고발했지만, 유권자들의 선택에는 결정적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정치 사상가 한나 아렌트는 1967년 발표한 에세이 ‘진실과 정치’에서 이렇게 말했다. “거짓말쟁이는 대중의 이익과 기쁨 그리고 기대에 맞게 사실들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에 진실을 말하는 사람보다 더 설득력 있을 수 있다.” 트럼프는 기후변화가 미국인들의 일자리를 빼앗아 가기 위한 중국의 날조라고 주장했다. 자유무역협정을 미국에 유리하게 다 바꿔놓고, 자동화로 사라진 일자리도 되돌려놓겠다고 허풍을 쳤다. 유권자들은 현실화할 수 없는 그의 약속을 진실로 받아들였다. 전문가들은 이런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 객관적 진실은 존재하지 않고 오직 각자의 관점만이 유효하다고 설파한 19세기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까지 등장시켰다. 니체의 말처럼 ‘신은 죽었다’. 진실과 거짓을 가를 신의 관점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럴싸한 동화가 가혹한 현실을 이긴다.

 

탈진실의 시대에 언론은 무엇을 해야 하나. 시민의 진실 판단을 돕기 위한 사실 제공 역할을 못한다면 저널리즘의 존재 근거는 뭔가. 언론은 어떻게 시민의 지지를 회복할 수 있을까. 폴리티코의 베테랑 기자 글렌 스러시는 한 토론회에서 트럼프가 거짓을 무기화했듯이 언론은 사실을 무기화해야 한다며 이렇게 제안했다. “우리는 사실로 감싼 벽돌을 사람들의 창문 안으로 던져 넣어야 한다.” 2017년은 어느 때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언론의 존재 이유를 시험하는 한 해가 될 듯하다.

 

워싱턴 | 박영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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