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예트 광장 시위가 증명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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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박영환의 워싱턴 리포트

라파예트 광장 시위가 증명한 것

by 경향글로벌칼럼 2018. 8. 16.

“피부 색깔만으로 특권을 누렸던 시대를 그리워하며 폭력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 그들을 멈춰야 한다.” 지난 12일(현지시간) 오후 워싱턴 백악관 앞 라파예트 광장에서 만난 50대 백인 여성인 수전의 말이다. 그는 ‘당신의 인종주의를 애국주의인 척하지 말라’는 손팻말을 들고 있었다. 수전은 이날 오후 라파예트 광장을 채운 1000여명의 시위대 중 한 명이었다.

 

시민들이 휴일 오후 백악관 앞에 모인 이유는 극우단체의 집회를 저지하기 위해서다. 시민들의 “부끄러움을 알라”는 야유는 바리케이드 너머에서 ‘우파 단결2’라는 제목의 집회를 열고 있는 20여명의 백인 우월주의자들을 향했다. “나치는 꺼져라” “당신들은 소수지만 우리는 다수다”라는 구호가 이어졌다. 압도적인 반대 시위에 눌린 데다 때마침 천둥까지 치며 내린 비로 극우단체의 집회는 30여분 만에 마무리됐다. 집회를 조직한 제이슨 케슬러는 확성기로 연설을 했지만 반대 시위대의 함성에 눌렸다. 결국 이들은 준비된 차량에 나눠 타고 광장을 빠져나갔고 시위대는 환호했다. 경찰은 극우단체가 집회장에 등장할 때부터 주변을 둘러싸며 반대 시위대와의 충돌을 저지했다. 워싱턴으로 들어오는 고속도로에는 수백m 간격으로 경찰차가 배치돼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이날은 백인 극우단체 청년의 폭력에 의해 반대 시위대 여성 한 명이 사망한 샬러츠빌 사태 1주년이었다.

 

라파예트 광장의 풍경은 도널드 트럼프 정부 출범 후 인종주의 문제가 다시 부각되고 있는 미국 사회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노골적인 백인 우월주의가 표출되고 있고 이에 대한 경계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백인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집권한 트럼프 대통령은 인종주의 행태에 미지근한 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광장에서 만난 그레그란 이름의 70대 백인 남성은 “트럼프 정부 출범 이후 미국이 점점 우익화되고 있다. 인종주의는 미국의 정신이 아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최근 미국 사회에서는 퇴행이 곳곳에서 감지된다. BBC 보도에 따르면 지난 8일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서 음주운전으로 적발된 32세 여성은 경찰에게 “나는 깨끗한 순수혈통 백인”이라며 석방을 요구했다. 한편에서는 흑인에 대한 노골적 차별이 논란이 되고 있다. 미국프로풋볼(NFL) 선수들은 경찰의 흑인에 대한 폭력 행사를 비판하며 무릎꿇기 시위를 하고 있다.

 

트럼프 정부는 태생적으로 인종주의 문제를 안고 있다. 퓨리서치센터가 지난 9일 발표한 2016년 대선 유권자 분석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이 얻은 표의 88%는 백인 표였다. 특히 지지자의 절반이 넘는 63%가 대졸 미만 백인들이었다. 대졸 미만 비백인은 7%, 대졸 이상 비백인은 4%에 불과했다. 트럼프 대통령을 만든 절대 다수가 백인이고, 과거에 대한 향수가 강한 대졸 미만 백인들이 최대 주주임을 알 수 있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대선 구호가 사실은 ‘미국을 다시 하얗게’를 의미한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그런 탓인지 트럼프 대통령은 샬러츠빌 폭력 사태를 두고 양비론을 펴는 등 인종주의 논란에 명확히 선을 긋지 못한다. 흑인 하원의원을 “IQ가 낮다”고 비난하고, 아프리카 국가는 “거지소굴”이라고 말한다.

 

다행스러운 점은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잇따른 커밍아웃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견제하려는 시민들이 다수라는 점이다. 퓨리서치의 지난달 조사에서 백인들 중에서도 57%는 인종적 다양성 증가로 미국이 살기 좋아지고 있다고 답했다. 나빠지고 있다는 답은 10%에 불과했다. 트럼프 정부는 저소득 백인 계층의 향수를 자극한 게 지난 대선에선 승리 공식이었을 수 있지만 다음에는 약점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노골적인 백인 중심주의는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백인들을 자극하고, 비백인 유권자들의 연대를 공고하게 만들 뿐이다. 라파예트 광장 시위는 이를 증명했다.

 

<워싱턴 | 박영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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