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칼럼] 안보 무임승차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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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칼럼] 안보 무임승차론

by 경향글로벌칼럼 2015. 11. 3.

“과거 트럼프보다 더한 공약을 내건 사람도 있었는데, 당선된 뒤 어떻게 했는지 잘 알지 않느냐.” 도널드 트럼프의 ‘안보 무임승차론’에 대해 한국 정부가 어떻게 대응하고 있느냐는 한 기자의 물음에 대미외교를 담당하는 한 외교관이 “과도하게 반응할 필요 없다”며 한 대답이다.

트럼프가 지미 카터처럼 주한미군 철수 공약을 내걸고 있지도 않거니와, 당적이 다르고 40년 시차가 있는 두 사람의 발언 배경을 비교하는 것은 여러 모로 맞지 않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미국 군부와 관료조직은 그의 입장과 충돌할 수밖에 없고 그대로 정책이 수립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트럼프의 발언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것이 보통 미국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사회복지 전문 변호사인 티머시 카터는 “한국은 잘사는 나라 아니냐. 그런데 왜 우리가 아직도 지켜줘야 하느냐”고 말했다. 지난해 몬트리올 기본소득 국제학술대회에서 만난 이 변호사는 여러 측면에서 중도적 생각을 갖고 있다. 또 2년여 전 워싱턴 공항으로 입국하며 여권에 도장을 받기 위해 잠깐 대화해야 했던 출입국심사관 역시 뜬금없이 “한국은 잘사는데 왜 아직도 우리가 엄청난 세금을 대서 군대를 보내야 하느냐”고 물었다. 결국 도장을 찍어준 이 심사관은 시퀘스터(연방정부 예산 자동감축)에 따라 연말부터 그만두게 됐다는 사연을 털어놨다. 기자는 이런 물음들에 “미국이 해외 군대 주둔으로 득 보는 것은 없을까”라고 반문했지만 이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저었다. 그로 인한 득이 미국 국민들이 부담하는 돈과 생명에 값하는지는 따져볼 일이라는 것이었다.



미국이 국내 문제에 더 많이 치중하고 있다는 것은 지난 2년간 여러 계기를 통해 느낄 수 있었다. 공동체를 붕괴시킬 지경인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인도적 위기 수준에 이른 대량 총기 사고, 경찰의 인종차별적 법집행 등 골칫거리가 너무 많았다. 전임자 부시 행정부로부터 두 개의 전쟁을 물려받은 오바마는 뒤처리에 바빴고, 존 매케인 같은 매파들이 설 땅도 많이 줄어들었다. 트럼프가 비록 공화당 주류의 환심을 사지 못할 것이 확실한데도 한국의 안보 무임승차론 같은 것을 계속 거론하는 것은 공화당의 민심이 거기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침공을 재앙으로 평가하며, 푸틴과도 잘 지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버니 샌더스도 다르지 않다. 샌더스가 토론회나 인터뷰에서 대외정책과 관련해 많이 받는 질문은 “당신이 대통령이 되면 어떠한 경우에도 무력을 쓰지 않을 것인가”이다. 샌더스의 대답은 “외교를 최우선으로 하고 무력사용은 최후의 수단”이라는 것이다. 샌더스는 지난달 TV토론회에서 “미국을 위해 싸운 사람들은 끝까지 국가가 보살펴야 하지만, 그들을 전장으로 내몬 국가의 결정에는 반대한다”고 말했다. 이런 흐름의 예외는 힐러리 클린턴 등 몇몇 주류 정치인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사실 한반도 유사시 미군 파견에 찬성하는 여론은 늘 반대보다 낮았다. 미국의 한반도 방위 공약은 워싱턴 정치를 거치며 국민 여론과 다르게 정책 결정이 이뤄지는 대표적 사례 중 하나다. 그것은 한국 정부가 미국 조야를 상대로 열심히 작업한 결과이기도 하고, 미 정책결정자들의 세계전략에서 한반도에 대한 고려가 냉전 때부터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면 트럼프의 발언에서 취할 것은 무엇인가. 언젠가 워싱턴 정치가 민의의 왜곡 없이 작동하는 날이 온다면 그것은 안보를 미국에 의존하고 있는 한국 국민들에게는 재앙이라는 것이다. 실제 쓸 일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무기 시스템에 천문학적 돈을 투입할 정도의 대비 태세라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미국 사회의 변화에도 응당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 아닐까.


워싱턴 손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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