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칼럼] 일본 시민들의 ‘작은 나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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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서의동 특파원의 도쿄리포트

[특파원칼럼] 일본 시민들의 ‘작은 나라론’

by 경향글로벌칼럼 2012. 7. 18.

서의동 도쿄 특파원 phil21@kyunghyang.com


 

“일본이 작은 나라가 되는 것이 그리 부끄러운 일인가요.”


지난 16일 도쿄시내 요요기공원. 폭염에도 불구하고 17만명이 운집한 ‘사요나라 원전’ 집회에서 연사들의 말을 반쯤 흘려듣던 도중 여류 논픽션작가 사와치 히사에(澤地久枝)의 말이 귀에 생생하게 꽂혔다. 사와치는 81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또렷한 목소리로 “작은 국토에 걸맞은, (대신) 일본에 태어나길 잘했다고 느낄 수 있는 나라를 만들자”고 호소했다. ‘작은 나라’는 매우 함축적인 말이다. 최근 일본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갈등의 본질을 짚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도쿄에서 열린 원전 반대 집회 (경향신문DB)


 장기불황에 저출산·고령화로 경제활력이 줄어들면서 일본은 세계 2위이던 국내총생산(GDP)을 2010년 중국에 추월당한 데 이어 지난해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근원적인 선택에 직면해 있다. ‘일본이 앞으로 어떤 경로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한쪽에선 ‘대국(大國)의 부활’을, 다른 쪽에선 ‘작고 안전한 나라’를 제시하고 있다.


기존 산업계는 제조업 수출에 의한 성장력 회복을 통해 ‘대국 부활’에 나서자고 한다. 전자·자동차 등 거대 장치산업과 전력회사들이 주축인 재계단체 게이단렌(經團聯)이 주로 내세우는 주장이다. 


그러려면 원전을 재가동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값싼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아야 제조업 수출이 원활히 이뤄질 수 있다는 논리이다. 


반면 재래형 성장주의에 반대하는 이들은 ‘대국 강박증’에서 벗어날 것을 호소한다. 일본은 세계 최대의 채권 보유국이자 풍부한 자산과 경제사회 인프라를 갖춘 성숙경제이기 때문에 성장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고 강조한다. 


성장론에 집착할 경우 신흥국들과 수출경쟁을 벌이느라 저임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내수가 줄어들면서 불황이 지속된다는 것이다. 대신 해외투자로 벌어들인 부를 재분배해 격차를 해소하고, 지역경제와 지역공동체의 내실화에 힘을 쏟자고 한다. 수출제조업 의존구조에서 벗어나고, 인구감소의 현실을 인정하면 원전을 새로 짓거나 재가동할 이유도 사라진다. 최근 일본에서 제기되고 있는 ‘하산(下山)론’도 비슷한 논거를 대고 있다. 


두 가지 경로 중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내각은 성장론의 편을 들었다. 자민당 이상으로 우파성향인 노다는 경제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대국을 지향하는 듯하다. 원전 재가동은 핵무장이 가능하도록 법을 고치고 무기수출 규제를 완화해 일본에 채워진 군사적 빗장을 풀려는 움직임과 ‘동전의 양면’으로 보인다. 


대국부활의 환상에 사로잡힌 보수 기득권층에게 “아이들이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고, 외국인들이 안심하고 찾아오는 나라를 만들자”는 시민들의 외침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다. 노다 총리가 관저 앞 시위대의 목소리를 ‘잡음’으로 표현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1945년 원폭에 이어 두 번째로 대량 피폭을 당한 일본인들은 달라졌다. 매주 금요일 총리 관저 앞과 국회의사당 거리를 메우는 시민들은 후쿠시마 이전의 양순했던 그들이 아니다. 관저에는 이번주에도 다음주에도 ‘작고 안전한 나라’를 만들자는 외침이 이어질 것이다. 시민들의 힘에 놀란 여당의원들이 속속 탈당계를 내며 민주당을 떠나고 있다. 


일본의 반원전 시위는 ‘수국혁명’으로 불린다. 작은 꽃망울이 모여 큰 봉오리를 이루는 수국처럼 시민 개개인의 힘이 일본의 방향을 바꿀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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