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 올림픽 이면에 잠복한 한반도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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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유신모의 외교 포커스

평창 올림픽 이면에 잠복한 한반도 위기

by 경향글로벌칼럼 2018. 1. 25.

북한이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 결정 이후 곧바로 남북 고위급회담에 나와 선수단·응원단·예술단 파견 문제를 일사천리로 결정해 나가고 있다. 불과 한 달 전까지 대화제의에 꿈쩍도 않던 것과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다. 이런 추세라면 평창 올림픽은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치러질 수 있다.

 

그러나 실제 한반도 상황은 어느 때보다 위험하다. 평화올림픽에 대한 기대와 안도 뒤에는 한층 더 팽팽해진 긴장감이 잠복해 있다. 한반도 정세를 좌우할 ‘본게임’이 올림픽 이후에 벌어지기 때문이다. 어렵게 만들어진 남과 북의 가느다란 대화통로가 한반도 주변에 터질 듯이 가득 찬 긴장의 에너지를 분출시키는 출구로 이어질 수 있을지 여부가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할 것이다.

 

북한은 미국을 공격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능력을 곧 갖게 된다. 길어야 수개월밖에 시간이 없다. 미국은 이를 방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 단계에 도달하기 전에 외교적 협상으로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되면 군사적 수단으로 위협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 미국 내에 압도적으로 널리 퍼져 있는 공통 인식이다. 지금 미국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가 아니라 버락 오바마라고 해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미국은 눈앞에 닥친 국가안보 위협을 ‘전략적으로 인내하는’ 나라가 아니다.

 

전쟁을 피하려면 미국과 북한의 대화 공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북·미는 그동안 매우 거칠게 대결국면을 유지해온 탓에 쉽게 계기를 찾지 못하고 있다. 평창 올림픽은 이처럼 파국의 순간을 앞에 두고 열린 마지막 기회의 창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금이 한반도 상황의 결정적 기로라는 것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지난 22일 수석보좌관회의에서 ‘한반도에 전쟁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상황에서 극적으로 마련된 남북대화’라는 표현을 썼다. 또 “바람 앞에 촛불을 지키듯이 대화를 지키고 키우는 데 힘을 모아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는 대목에선 현 상황에 대한 절박한 인식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이번 남북대화가 북·미 접촉으로 이어지지 못할 경우 한반도가 매우 위험해진다는 것을 미국과 북한이 모두 알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은 남북대화를 전폭 지지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군사적 행동을 일단 유보하고 북한의 의중을 확인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갖고 싶다는 의미다.

 

북한 역시 ‘핵무력 완성’을 선언한 이후의 전략적 변화가 필요하다. 미국의 군사적 행동 가능성과 국제사회의 전방위적 제재 강화도 큰 부담이다. 특히 미·중이 북한의 급변사태를 논의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북한에 심각한 위협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라는 ‘버퍼(완충지대)’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꼭 김정은 정권일 필요는 없다는 인식을 중국이 갖기 시작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북한의 평창 올림픽 참가는 이 같은 상황에서 결정된 대화의 신호다.

 

한국은 올림픽을 계기로 한 남북대화를 안전하게 북·미 접촉으로 이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됐다. 특히 북·미가 한 번 접촉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 간극을 좁힐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해야 한다. 이것이 성공하려면 올림픽과 남북관계에 대한 정부의 접근법이 전략적이어야 한다.

 

문재인 정부는 평창 올림픽에 참석한 북한 고위급 인사와 의미 있는 정치적 합의를 만들어 새로운 남북관계 틀을 구축한다는 ‘평창 구상’에 강한 애착을 갖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이 같은 구상을 실행할 적기가 아니다. 정부 출범 초기부터 꾸준히 남북관계가 개선되고 이산가족 상봉, 민간교류를 거쳐 신뢰가 쌓인 상태에서 북한이 평창 올림픽에 참가했다면 ‘평창 구상’이 가능할지 모른다. 하지만 중간 과정을 다 생략하고 갑자기 북한이 올림픽에 뛰어들어온 상황에서 ‘남북관계의 그랜드디자인’은 불가능하다.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남북관계의 새로운 틀을 위한 ‘홈런성 타구’가 아니라 북·미 대화의 연결고리 역할을 충실히 해낼 ‘진루타 1개’다.

 

남북관계에서도 습관화된 과거의 패턴을 벗어나야 한다. 북핵 문제가 심화되고 남북 적대관계가 지속되는 동안 국민들의 대북인식은 극도로 악화됐다. 적대적인 국민정서가 안타깝긴 하지만, 그게 현실이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주어진 현실에서 해법을 찾는 것이다. 남북관계를 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남북관계와 한반도 문제는 이미 남북만의 문제가 아니다. 국제적 환경과 조화를 이뤄야 하고 북핵 문제와도 연계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다’ 식의 감성적 접근으로는 풀 수 없다. 비즈니스는 가슴이 아니라 머리로 하는 것이다. 그것이 북한·한반도 문제와 관련된 비즈니스라면 더욱 그래야 한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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