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험난한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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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유신모의 외교 포커스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험난한 여정

by 경향글로벌칼럼 2018. 3. 22.

2018년 3월 한반도에는 봄기운이 감돈다. 곧 전쟁이 나더라도 이상할 것 같지 않던 엄혹한 상황에서 노심초사하던 것이 불과 한 달여 전 일인데 언제 그랬냐는 듯 한순간에 모든 것이 변했다. 이제 ‘항구적 한반도 평화’라는 목적지를 향한 길고 지난한 항해가 곧 시작된다. 지구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냉전의 섬’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대장정이다. 가는 도중 어떤 암초와 풍랑을 만날지,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릴지, 과연 끝까지 갈 수는 있는지 모든 것이 불투명하다. 생각할수록 아득한 여정이지만 지금까지 지나온 위기의 과정을 생각해보면 지금 이 길을 떠날 수 있게 된 것만 해도 천행이다.

 

온갖 제재와 설득에도 요지부동이던 북한이 갑자기 태도를 바꿈으로써 극적인 반전이 이뤄졌다. 북한이 비핵화 대화를 받아들이면서 반대급부로 제시한 핵심 요구 사항은 ‘체제안전 보장’이다. 핵무기를 가질 필요가 없는 안보환경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북한이 수십년간 국제사회와 정면으로 맞서면서 핵개발에 매달려온 최종 목표가 무엇이었는지 분명해진 셈이다. 하지만 북한의 비핵화와 체제안전 보장을 맞바꾼다는 간단한 명제 안에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복잡하고 민감한 문제들이 가득 차 있다.

 

비핵화는 북한의 핵폐기는 물론 이를 검증하는 작업이 수반된다. 또 핵폐기 이후 다시 핵무장 유혹을 느끼지 않도록 동북아시아 안보환경을 다자안보체제로 바꿔주는 것도 여기에 포함된다. 북한의 체제안전 보장은 북·미 적대관계 종식과 각종 대북 제재의 해제를 의미한다. 이를 위해서는 한반도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대체하고 북·미관계를 정상화하는 작업이 뒷받침돼야 한다. 이 모든 스텝 하나하나가 세계사에서 유사한 사례조차 찾기 힘들 정도로 희귀하고 어려운 작업이다.

 

핵무기 완성 단계에서 스스로 핵을 포기한 국가는 지금까지 없었다. 세계 21개국이 유엔군의 깃발 아래 참전했다가 ‘일시 중단’ 상태로 60년 넘도록 이어져온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꾸는 것은 전인미답의 길이다. 또한 미국이 공식적으로 교전 당사국이며 불법 핵무장국이자 최악의 인권탄압국으로 낙인찍힌 북한과 정식 수교를 하는 것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한반도 평화정착은 이 모든 것들을 병행 추진해 보조를 맞춰 진전시키다가 최종 단계에 이르러 한꺼번에 동시 발효시켜야 하는 어마어마한 작업이다.

 

이 대목에서 당사국들이 과연 이 같은 험난한 여정을 떠날 준비가 돼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북핵 문제는 냉전체제와 동북아시아의 미묘한 역학관계,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질서의 모순 등이 모두 집약돼 만들어진 산물이다. 1990년대 초반 북핵 위기가 처음 터졌을 때 당사국들은 한반도 평화정착 과정이 선행되어야 문제를 풀 수 있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당사국들은 이 같은 본질을 회피하고 뒤로 미루면서 북한의 붕괴를 기다리거나, 북한의 핵물질과 기폭장치만 외과수술하듯 도려내는 방법을 찾기 위해 20년 넘는 세월을 보냈다. 지금에 와서 60년 이상 쌓여진 국제정치의 모순을 한꺼번에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 몰린 것은 자업자득일 수도 있고 만시지탄일 수도 있다.

 

한국의 대북정책은 보수와 진보정권을 거치는 동안 갈지자 행보를 거듭했고 국내정치의 도구로 활용돼왔다. 평화체제에 대한 준비가 돼 있을 리 없다. 지금의 상황도 전쟁을 피하기 위해 ‘북·미 접촉 성사’에 전력투구하다가 갑자기 맞닥뜨린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의 파격적 정상회담 제안을 즉각 수용하는 ‘더 큰 파격’으로 대응했지만, 본디 행동을 먼저하고 계획은 나중에 세우는 그의 성향상 면밀한 대비가 돼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더욱이 업적 과시에 집착하는 그가 한반도 문제 해결이라는 장기 프로젝트의 열매를 자신의 임기 내에 따먹을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해질 경우 어떤 태도를 보일지 알기 어렵다.

 

북·미 정상회담이 열리면 양국 최고지도자들은 원칙적 선언 수준의 합의를 하게 될 것이다. 구체적 로드맵을 만들기 위해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 험난한 이행 협상이 이어질 것이다. 그 과정에서 각국 이해관계가 충돌하고 국내정치적 요소가 개입되면 수많은 시행착오와 갈등이 빚어질 수 있다. 정치적 선언을 통해 입구에 들어선 이후 출구를 찾지 못해 미로를 헤매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지금으로서는 출항의 뱃고동이 울리기 전에 모든 준비가 완료될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앞으로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인내심을 갖고 항해를 마치겠다는 각오는 반드시 필요하다. 전쟁과 평화의 갈림길에서 극적으로 만들어진 이번 대화 국면은 아마도 한반도의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를 이룰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것이기 때문이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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