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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6일 오후 5시17분 프란치스코 교황을 만나기 위해 바티칸에 도착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헬무트 콜 전 총리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뉴스 보도를 통해서였다. 메르켈은 급히 조용한 장소를 찾아 콜의 부인 마이케 리히터에게 전화를 걸었다.

 

애도를 표하고 장례 절차를 논의해야 했다. ‘독일 통일의 설계자’ 콜에게는 국장이 마땅했다. 리히터는 유럽장(葬)을 말했다. 리히터는 이미 장-클로드 융커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과 얘기를 끝낸 뒤였다. 다음날 융커는 독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유럽장을 거론하며 운을 띄웠다. 콜이 유럽통합에 기여했고, 세 명뿐인 EU명예시민이기에 자격은 충분했다. 그렇게 콜은 지난 1일 치러진 사상 첫 유럽장의 주인공이 됐다. 콜의 영결식은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의 유럽의회에서 치러졌다. 그가 안치된 관은 라인강을 따라 고향 인근 독일 남서부 슈파이어 성당으로 옮겨져 장례미사 후 묘지에 묻혔다.

 

1일(현지시간) 첫 유럽연합(EU)장으로 치러진 헬무트 콜 전 독일 총리의 장례식에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과 장-클로드 융커 EU 집행위원장,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앞줄 왼쪽에서 두번째부터) 등이 참석해 고인을 추모하고 있다. 콜 전 총리의 시신을 실은 관은 이날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유럽의회에서 영결식을 마친 뒤 라인강을 따라 배로 이동해 고인의 고향 인근 독일 남서부 슈파이어의 아데나우어 공원묘지에 묻혔다. 슈파이어 _ EPA연합뉴스

 

정작 독일 국민들은 콜의 업적을 제대로 기리고 애도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콜의 부인은 독일 땅에서 이뤄지는 어떤 국가 의식도 거부했다. 리히터가 생각한 유럽의회 영결식 초대 명단에는 당초 독일 정치인이 한 명도 없었다. 나중에 주변에서 리히터를 설득해 메르켈만 간신히 추도사를 할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메르켈은 ‘정치적 아버지’를 보내는 ‘상주’가 아니라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등 여러 연사 중 한 명일 뿐이었다.

 

의도는 명백했다. 콜은 말년에 메르켈을 “배신자”라 불렀다. 콜은 동독 정부의 부대변인이던 메르켈을 중앙 정계에 발탁했지만, 1998년 기독민주연합의 정치자금 스캔들 때 메르켈에 의해 당 대표에서 물러나야 했다. 콜은 메르켈이 등에 칼을 꽂았다고 여겼다. 콜의 분노를 샀던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대통령도 초대받지 못했다. 콜의 후임 총리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콜 임기 말년의 자료 파기문제를 조사할 때 슈타인마이어가 총리실 실장이었다.

 

콜의 두 아들은 독일 통일의 상징인 베를린 브란덴부르크문 앞에서 국장을 치르길 원했다고 한다. 또 아버지가 2001년 불행하게 자살한 어머니 하넬로어 옆에 묻히길 바랐지만 리히터는 거부했다. 콜이 1990년대 중반부터 가깝게 지내던 35살 연하의 총리실 직원 리히터와 2008년 재혼한 뒤 부자는 의절하다시피 했고 가까운 친구, 지인들과의 관계도 단절됐다. 큰아들 발터는 콜의 별세 후 콜의 자택을 찾았지만 들어가지도 못했다. 콜의 가족은 슈파이어 장례미사에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는 독일인들의 마음은 극도로 불편한 듯하다. 오늘의 독일을 만든 주인공에게 오늘의 독일이 부정당하는 모양이 됐기 때문이다. 콜은 그저 이름난 정치인이 아니라 말 그대로 독일 역사의 한 장(章)이었다. 메르켈의 말대로 “콜이 없었다면 나를 포함해 1990년 전까지 베를린 장벽 뒤편(동독)에 살았던 수백만명은 완전히 다른 길을 걸었을 것”이다.

 

그러나 분노와 적대로 말년을 보낸 콜의 마지막 가는 길은 상처로 얼룩졌다. 콜의 정치적 유산은 콜만의 것도, 특정 유족의 것만도, 독일인의 것만도 아니다. 콜의 삶은 자신에 의해서도, 다른 누군가에 의해서도 윤색되거나 삭제될 수 없는 공공의 기억이다. 콜은 기록 파기를 강력히 부인해 왔지만 그의 총리 재임 16년 동안의 총리실 기록에는 상당한 공백이 있다. 특히 독일 통일을 추진한 1989~1990년 당시 기록들이 없다고 한다. 콜의 자택에는 그가 남긴 방대한 자료가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리히터가 ‘권리’를 주장한다는 이 기록은 누구의 것일까.

 

개인의 영욕 앞에 역사의 무게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정치인의 마지막은 씁쓸했다. 시대가 기록하는 이의 족적은 묘지에도 찍혀야 한다.

 

국제부 이인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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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