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식 얽매인 일본인의 사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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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윤희일의 특파원 칼럼

형식 얽매인 일본인의 사죄

by 경향글로벌칼럼 2016. 2. 23.

최근 미국·영국·독일·싱가포르 등 세계 각국 언론인들과 함께 일본인의 ‘사죄’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는 기회가 있었다. 요즘 들어 일본의 정치인과 연예인 등 유명인은 물론 기업들이 각종 ‘사건’을 일으킨 뒤 이를 수습하기 위해 잇따라 ‘사죄회견’을 열고 있는 것이 그 배경이었다. 다수의 참석자들이 내린 결론은 일본인들의 사죄는 지나치게 ‘형식’에 매달리는 경향이 있으며, 알맹이나 진심이 없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다.

불법 정치자금 수수 의혹을 받아오던 아마리 아키라(甘利明·66) 경제재생담당상이 지난달 28일 기자회견을 열고 한 건설회사로부터 각료 재임 중 모두 100만엔(약 1091만원)을 받은 사실을 인정하면서 각료직을 사임했다. 아마리는 경제재생과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등의 업무를 맡아온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측근이다. 그는 이날 회견을 통해 장관실 등에서 현금을 직접 받았다는 의혹을 상당 부분 시인했다.

그는 “국민에게 부끄러운 사태를 초래했다”며 고개를 숙였고, 회견 도중 눈물을 글썽이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의 기자회견은 당일 오후 공영방송인 NHK의 전파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됐다. 얼마 전까지 TPP 협상 대표로 활약하던 각료가 눈물을 흘리며 사죄하는 모습을 본 국민들 사이에서 동정론이 확산됐다. 뒤이어 TV에 등장한 아베 총리는 “임명 책임은 나에게 있다. 국민 여러분께 깊이 사죄의 말씀을 드린다”고 거들었다.

회견을 본 사람들의 입에서 “기억나는 것은 아마리의 ‘눈물’밖에 없다”는 평가가 많이 나왔다. 그의 의혹이 사실상 알선수재성 범죄일 수 있다는 분석이나, 각료직은 내놓으면서도 국회의원직은 끝까지 유지하기로 한 것은 문제가 있다는 등의 비판은 눈물과 함께 휩쓸려갔다.

아마리 아키라(甘利明) 일본 경제산업상_AP연합뉴스

이런 전후 사정 때문에 이번 기자회견이 총리 관저 쪽에 의해 철저하게 기획됐을 것이라는 말도 나왔다. ‘기획설’이 사실인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눈물회견’의 효과만은 컸다. 당초 일본 언론들은 아마리의 정치자금 수수 의혹이 오는 7월 참의원 선거를 앞둔 아베 정권에 큰 타격이 될 것이라는 기사를 쏟아냈다. 그러나 회견 직후 실시된 각 언론의 여론조사에서 아베 정권의 지지율은 오히려 상승했다.

일본의 ‘국민그룹’으로 일컬어지는 5인조 남성 그룹 스마프(SMAP) 해산설 소동 이후 진행된 일종의 사죄방송이 소속사 시스템의 구조적인 문제 등은 눈을 감은 채 ‘앞으로 잘하겠다’는 멤버들의 다짐으로 채워진 데 대해서도 ‘핵심 없는 사죄’라는 비판이 나왔다. 지난해 말 한·일 위안부 합의에서 아베 총리의 ‘사죄와 반성’을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외무상의 대독으로 얼버무린 것에 대해서는 일본인들이 중시해온 ‘형식’조차도 무시된 사죄라는 혹평이 나왔다.

해외 언론인들의 논의가 막바지에 이를 즈음 나온 한 독일 출신 언론인의 지적은 ‘형식적 사죄’로 당장의 위기상황에서 빠져나가는 데만 급급해하는 일본인들이 새겨들어야 할 내용으로 관심을 모았다. “사죄는 상대방이 납득할 때까지 계속해야 합니다. 독일이 과거 전쟁의 잘못에 대해 반복적으로 사과하는 것을 하나의 모델로 삼을 필요가 있지요.” 그는 비록 형식적이기는 하지만 ‘사죄’를 중시하는 일본의 문화에는 일정한 의미가 있다고 보면서도, 사죄할 때는 잘못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그에 대한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사고’를 치고도 이벤트성 사죄를 통해 대충 위기를 넘기려 하는 일본의 정치인·연예인·기업은 물론 역사수정주의의 길을 가면서 과거 역사의 잘못에 대한 진심 어린 사죄를 피해가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아베 정권까지 꼭 새겨들어야 할 충고로 느껴졌다.


윤희일 도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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