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과 전체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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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더글러스 러미스 칼럼

휴대폰과 전체주의

by 경향글로벌칼럼 2013. 8. 20.

내가 절대 갖고 싶지 않은 것을 꼽자면 첫번째는 암(癌)이고, 두번째는 부러진 다리, 세번째는 휴대전화다. 휴대전화를 꼽은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번째 이유는 개인적인 것이다. 나는 전화벨이 울리는 걸 싫어한다. 울리는 전화벨은 마치 당신이 무엇을 하고 있든, 당장 멈추고 전화를 받으라는 명령처럼 느껴진다. 독서 중일 수도 있고 요리를 하거나 연애를 하는 중일 수도 있지만 뭐든 상관 없다. 전화벨이 울리면 하던 일을 멈추고 전화를 들어야 한다.


나는 도쿄에 살 때 대도시 거주의 기쁨 중 하나가 익명성에서 오는 자유라는 점을 알게 됐다. 기차를 탈 때나 분주한 거리를 거닐 때, 세상 어느 누구도 내가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한다. 내 주위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는 경우를 제외하면 말이다. 나는 매일 일터에 오가며 세 시간가량 방해받지 않고 독서할 시간을 가졌다. 그 동안은 어떤 전화로부터도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로서는 어딜 가든 전화기를 몸에 지니고 다닌다는 것을 생각만 해도 견디기 어렵다.


나는 종종 이런 경험을 한다. 커피숍에 앉아 누군가와 얘기하다가 대화가 재미있을 무렵 상대방의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한다. 그 사람은 미안한 표정으로 내 눈치를 살피며 주섬주섬 전화를 찾는다. 마치 주인의 부름을 받은 굴욕적인 하인처럼 행동한다. “이 호주머니였나? 아니지, 저 호주머니야. 아니야, 아, 아마도 가방에 있나보다. 아, 여기 있네. 미안해요. 잠깐만. 여보세요?” 그런 모습을 보며 나는 생각한다. ‘나는 저런 걸 갖고 싶지 않아. 절대로.’


(경향DB)


휴대전화를 들고 다니면 ‘아무도 내가 지금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는’ 류의 경험을 하지 못한다. 특히 휴대전화에 위치추적장치라도 달려있기라도 하면, 막말로 경찰이 당신이 매 순간 어디를 걸어가고 있는지 정확히 알아낼 수 있다. 에드워드 스노든이 분명히 보여주었듯이 정부 요원들은 당신이 휴대전화에 말하는 것이나 쓰는 것을 언제든 읽어낼 수 있다. 대중이 완전한 감시 체계에 자발적으로 동참하다니 놀랍지 않은가. 정부의 감시 요원들 입장에서 보자면 그야말로 꿈이 실현되는 것이다.


이반 일리치는 어떤 발명품이 거꾸로 우리 삶을 지배하는 현상을 ‘근원적 독점(radical monopoly)’으로 표현했다. 가령 누군가 자동차를 발명했다고 하자. 처음에 그것은 비싼 사치품이거나 부자들의 장난감이었다. 하지만 점차 많은 자동차들이 판매되며 도시는 그에 맞게끔 재설계된다. 대형 마트가 생겨나고 골목 상권은 사라진다. 곧 식료품 구매 등 가족 생활에 필요한 많은 일들이 자동차 없이는 불가능하게 된다. 자동차는 필수품이 된다. ‘제대로’ 된 삶을 위해 당신은 꼭 차를 몰아야 한다.


지하철에서 시민들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경향DB)


휴대전화는 ‘근원적 독점’ 효과를 한 단계 더 끌어올렸다. 휴대전화 이용자들은 자발적으로 휴대전화 ‘영업사원’으로 조직화된다. “뭐라고, 휴대전화가 아직도 없어?” 여기서 ‘아직도’가 중요하다. 휴대전화가 없는 사람들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간주될 뿐만 아니라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이 없고 심지어 무례하다는 얘기도 듣는다. 우리 사회의 모든 사람이 밤낮 가리지 않고 언제 어디서든 휴대전화로 연락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점점 더 상식처럼 되고 있다. 휴대전화를 강권하는 사람은 영업사원이 아니라 바로 사용자들이다. 사회 전체가 휴대전화 판매 부서로 조직화돼 나처럼 완강하게 버티는 사람들에게 압력을 가하고, 마음 약하게 만들어 그 끔찍한 물건을 장만하게 만든다. 나는 아직 가까스로 버티고 있지만 쉽지 않다.


‘근원적 독점’이란 말은 이 새로운 현상을 다 담아내지 못한다. 휴대전화 구매 압력은 편리함이나 필수재로서의 압력 정도가 아니다. 안 사겠다고 버티는 사람은 ‘왕따’가 될 각오를 해야 한다. 이 현상을 포착하기 위해 나는 ‘전체주의적 독점(totalitarian monopoly)’이란 말을 쓰고자 한다. 여기서 ‘전체주의’는 정치적 극단이란 뜻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 전체를 소비자이면서 동시에 영업사원으로 조직화하는 전체성을 향한 역동적인 기획이다. 생산자들에게 그것은 꿈이 실현되는 것이다.



더글러스 러미스 | 평화운동가·전 도쿄 쓰다주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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