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지역소비’의 유토피아 英 토트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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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 가다 /경향신문 지나간 기획

(5)-1 ‘지역소비’의 유토피아 英 토트네스

by 경향글로벌칼럼 2008. 8. 24.

ㆍ탄탄한 경제·돈독한 유대 지역화폐 ‘tp’로 산다

토트네스 | 글·사진 정환보기자



“소박하고 아름다운 곳이에요. 평화로운 마을이기도 하지요.”



지난 6월 말 영국 남서부 데본주의 토트네스에서 만난 베스 크레든 할머니의 말이다. 토트네스는 영국의 은퇴 노년층과 보헤미안 스타일의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는 젊은이들에게 인기있는 인구 8000여명의 소도시다. 


 


영국 남서부 토트네스의 상점가인 하이스트리트의 주말 풍경. 토트네스는 윤리적 생산·유통·소비를 모범적으로 실천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영국에서는 보기 드물게 가파른 오르막길에 형성된 중심가인 토트네스의 하이스트리트에는 ‘윤리적 상점’들이 가득했다. 인근 지역에서 생산한 육류와 식료품을 파는 정육점, 야채 가게, 식당은 물론 공정무역 옷가게들도 여럿 보였다.



상점들 3분의2 가량 동참



이들 가게의 출입문에 붙어있는 표지 하나가 눈에 띄었다. 그것은 지역 화폐인 ‘토트네스 파운드(tp)’ 사용이 가능하다는 표지였다. 200m 남짓한 하이스트리트에 있는 전체 상점의 3분의 2가량은 이 표지를 붙여 놓았다. 1토트네스 파운드는 1파운드에 해당한다. 일부 상품과 식당 메뉴만 tp로 계산하면 2~3%가량의 할인이 될 뿐 대부분은 가격이 같다.



환율도 똑같고 가격도 대동소이한데, 지역 화폐를 받는 상점이 많은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화폐를 발행하는 일종의 중앙은행 ‘토트네스 변혁 마을(Transition Town Totnes, TTT)’ 단체의 본부를 찾아 물었다. 답은 간단했다. “토트네스 파운드가 이 지역의 경제를 튼튼하게 하기 때문”이었다.



TTT의 공동설립자 롭 홉킨스는 “지구적 규모의 자본·상품·서비스 순환이 이루어지는 현재 상황에서는 일부 대도시를 제외하고는 돈이 그 지역을 빠져나가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라고 말했다. 같은 금액을 쓰더라도 지역 내에서 순환하는 화폐를 사용하면 궁극적으로 지역경제를 강화할 수 있다는 논리다. 개인의 지출이 거대자본에 흡수되지 않는다는 것이 지역 화폐의 힘이라는 설명이다.



현재 통용되고 있는 토트네스 파운드는 2007년 3월 TTT가 발행한 것이다. 1tp권 지폐만 발행되며 300tp(약 60만원)로 시작했다. 2년도 안 된 현재 이 지역에는 6000tp(1200만원)가 돌고 있다. 취지에 공감한 주민들의 참여로 토트네스 파운드가 성공적으로 뿌리내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반응에 고무된 TTT는 상점과 상점 간의 거래 편의를 위한 전자화폐 도입을 준비 중이다.



홉킨스는 지역 화폐 활성화가 환경을 살릴 수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지역 화폐는 지역 상점들만 쓰기 때문에 결국 ‘지역 상점 이용 캠페인’과 다르지 않다. 지역 화폐가 지역민의 생활 속에 자리잡게 되면 에너지 소비의 주범 중 하나인 대형 마트가 설 땅이 사라진다.



대형마트 추방 환경도 살려


 


토트네스 하이스트리트의 한 식료품점에 지역 화폐인 토트네스 파운드로 결제가 가능하다는 표지가 붙어 있다.


 

가까운 곳에서 충분히 좋은 상품을 살 수 있는데, 단지 싸다는 이유로 대형 마트를 찾는 것이 일반적인 현대인들의 소비 행태다. 대형 마트는 가격을 낮추기 위해 많은 양의 에너지를 소비하고 탄소를 발생시킨다. 유통 거리와 가격을 맞바꾼 것이다. 하지만 홉킨스의 생각은 달랐다. 당장은 쌀지 몰라도 결국 가격 수준이 오르는 게 대형 유통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가격은 작은 문제일 수 있다. 화석 연료에 의존하는 에너지 구조와 지구 환경 문제는 다음 세대의 생명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홉킨스는 “앞으로는 작은 것이 필수적인 시대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토트네스 파운드는 작지만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하나의 방편이었다.

유로화가 유럽 통합의 상징이듯 토트네스 파운드는 토트네스 주민들의 돈독한 유대관계를 나타내는 상징이기도 하다. 하이스트리트 꼭대기에 있는 ‘비숍스턴’은 공정무역을 거친 인도풍 의류를 판매하는 상점이다. 이곳에서 지난해부터 일하고 있는 홀리 보드머(22)는 토트네스 자랑에 열을 올렸다. 보드머는 “토트네스 태생은 아니지만 이곳은 고향보다 더 고향같다”고 말했다. 특히 지역사회 구성원들 사이의 친밀한 관계가 좋다고 했다. 그는 “이곳의 많은 사람들이 긍정적인 인생관을 갖고 있고 ‘소규모 공동체’를 이루고 있기에 유대관계 형성이 잘 되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가게가 공동체 ‘고리’ 역할

 


지역 화폐 토트네스 파운드




하이스트리트의 상점은 물건만을 파는 것이 아니라 마을공동체의 연결고리 역할도 한다. 커피와 주스 등을 파는 ‘레몬젤리’ 카페에는 ‘주민 후원 모금함’이 있다. 이번 후원 대상은 여자친구와 베트남 자전거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토비 포트(24)다. 그는 자전거 사고로 중상을 입어 2년여간 병상 신세를 졌고 최근 건강을 회복했다. 레몬젤리 매장에는 그의 완쾌를 축하하는 토트네스 주민들과 관광객들의 메시지가 담긴 방명록이 비치돼 있었다. 이들은 1~100파운드의 후원금을 기꺼이 내놓았다.



하이스트리트 옆에 있는 ‘마켓 스퀘어’에서는 매주 금요일과 토요일에 장이 열린다. 간이 판매대를 고정적으로 차리는 업체는 11곳 정도다. 모두 장터 인근에 거주하면서 직접 생산한 식료품을 판다. 치즈, 잼, 빵 등이 주로 사고파는 식품들이다. 식품 이외에도 각종 중고제품을 판매하는 벼룩시장도 성행하고 있다. 헌책 판매대에서는 ‘로컬 푸드’와 대안적 삶을 소개하는 책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에는 마을회관에서 ‘직거래장터’가 열린다. 여기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많이 파는 게 목적이 아니다. 사람과 교류하고 직접 만든 식품을 이웃과 나누어 갖는 것이 목적이다. 2000년부터 이곳에서 달걀과 달걀요리를 팔고 있는 리오아나 마티아스는 “내가 만든 음식을 누군가 먹고 싶어한다는 것 자체가 행복하다”고 말했다.



주민들 “삶과 소비는 하나”



장터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에는 활력이 넘쳤다. 삶과 소비가 분리되지 않은 토트네스 주민들은 윤리적 소비를 체득한 사람들이었다. 다음달 TTT 지역행사 준비에 여념이 없는 홉킨스는 달라이 라마가 말한 ‘우리 시대의 역설’을 항상 가슴에 새겨두고 있다. 그는 ‘인류는 달나라까지 다녀왔지만 이웃을 만나기는 더 어려워졌다’ ‘현대인들은 편리하게 살게 됐지만 시간은 더 부족해졌다’고 한 달라이 라마의 말을 전하면서 “토트네스에서의 삶은 여느 현대인들과 다른 삶이라서 행복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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