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중관계 시즌2’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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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유신모의 외교 포커스

‘북·중관계 시즌2’가 시작됐다

by 경향글로벌칼럼 2015. 10. 12.

로마가 멸망한 이유에 대해 “로마는 주변의 바바리안들도 로마인처럼 생각하고 로마인처럼 행동할 것으로 잘못 판단했다”고 했던 어느 역사학자의 말은 항상 북한을 연상시킨다. 지난 세월 서방이 북한의 행동을 예측하는데 지속적으로 실패해왔던 이유가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폐쇄적인 국가인 북한을 우리 기준의 상식과 보편성에 기초해 판단하는 것이 맞을 리 없다. 어쩌면 북한이 그동안 보여왔던 예상 밖의 행동들은 실상 북한이 의도적으로 허를 찌른 것이 아니라 북한의 실제 상황을 모르는 우리가 북한의 행동을 잘못 예측한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북한이 노동당 창건 70주년을 계기로 장거리 로켓을 발사하지 않은 것은 상식적인 결정이라는 점에서 의외다. 북한도 현재 상황에서는 로켓을 쏘지 않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우리의 판단과 같은 결정을 내린 것이다. 북한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마치 커다란 양보를 한 것처럼 보이는 ‘착시 현상’이 일어나는 것도 이 의외성 때문이다.

북한이 ‘예상 밖의 상식적 결정’을 하게 된 배경에는 그동안 북한의 행동을 비교적 정확하게 예측해 온 중국의 영향력이 있었다. 김정은 정권 출범 이후 줄곧 북한에 냉랭했던 중국은 이번 행사를 계기로 북·중 관계 개선에 시동을 걸었다.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은 자신의 친서와 함께 권력서열 5위의 인사를 평양에 보냈다. 북한이 이를 받아들이고 도발적 대외 메시지를 자제한 것은 중국과의 관계 개선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탓일 가능성이 크다. 결과적으로 중국은 자신들만이 갖고 있는 ‘독점적 대북 지위’를 활용해 북한의 로켓 발사를 막았다.

이로써 2013년 북한의 3차 핵실험, 장성택 처형 등으로 차갑게 식었던 북·중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그동안 한번도 악수를 하지 않았던 시진핑-김정은 체제의 북·중 관계가 뒤늦게 출발점에 선 셈이다. 하지만 새롭게 펼쳐질 ‘북·중 관계 시즌2’가 2013년 이전의 후진타오(胡錦濤)-김정일 시대의 북·중 관계와 같을 수는 없다. 북·중이 각자 다른 길을 걸었던 지난 2년간 동북아시아와 한반도 주변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북한 영변 핵시설_연합뉴스


북한은 헌법에 ‘핵보유국’을 명시한 이후 줄곧 핵·경제 병진노선을 주장하고 있다. 북한의 병진노선은 처음부터 면밀히 계획된 방향이 아니라 20년간의 북핵 협상이 겉돈 결과로 선택의 여지가 없이 남겨진 정책이다. 북한으로서는 대외관계와 경제 문제 개선이 절실하긴 하지만 3번의 핵실험으로 어느 정도 확보된 핵 억지력을 포기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두가지를 모두 추구할 수밖에 없다.

중국은 미국의 아시아 재균형 정책에 심한 압박을 느끼고 있다. 미·중 관계는 협력보다는 대결적 구도가 더욱 선명해졌다. 일본은 이 같은 미·중 관계에 편승해 안보법제를 제·개정하고 군사적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북한 문제가 미·일의 대중국 압력 증가와 한·미 동맹의 군사적 기능 강화의 명분으로 활용되고 있음을 중국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이번 열병식에서 북·중은 우호적 메시지를 주고받았지만 껄끄러운 핵 문제는 정면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문제를 둘러싼 기싸움이 물밑에서 진행되고 있음이 느껴진다. 중국은 완곡한 어법으로 6자회담 재개와 비핵화의 필요성을 언급했으나 김정은은 ‘인민생활 개선을 위한 여건 조성’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며 핵포기 불가를 분명히 했다. 북한은 앞으로도 핵과 북·중 관계를 분리하는 ‘투트랙 전략’을 고수할 것이다.

향후 북·중 관계는 이 같은 양측의 입장 차이를 어떻게 다뤄 나가느냐에 따라 좌우될 것이다. 그 결과에 따라 한반도 정세도 큰 변화를 맞게 된다. 중국이 북한을 비핵화의 길로 유도하기 위해 팔을 걷고 나설지, 북한 핵문제를 적당히 관리하면서 북한을 미·일에 맞서기 위한 전략적 자산으로 활용하려 할지 아직은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중국이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해 북한이 갖고 있는 ‘합리적’ 안보 우려를 해소시켜야 한다는 입장에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중국이 앞으로 주도할 비핵화 해법이 한·미의 그것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미다.

미국은 연일 북한 문제에 대한 중국의 건설적 역할을 강조하며 중국에 ‘기대 반 우려 반’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현재 한·중이 사상 최고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호언한 청와대도 초조할 수밖에 없다. 한·미가 밤잠을 설치는 나날은 ‘북·중 관계 시즌2’가 본격적으로 개막될 때까지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


유신모 | 외교전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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